첫째날 - 성삼재에서 벽소령 약 14.1km
지리산에 간다. 몇년 전 박은혜와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꼭 오르리라 다짐했던 그 천왕봉에 오른다. 준민씨가 마침 한국에 와 있는 기간이라 같이 가기로 했다.
그래도 나름 한국의 첫 박산행인데 대피소만 미리 예약했을 뿐, 짐도 당일날 싸고 기차표도 떠나기 몇 시간 전에 사는 등.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한동안 산을 안다닌 후라 체력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동안 백패킹을 다닌 짬빱을 믿고 2박3일 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나섰다.
서울에서 지리산을 가는 정석 코스는 이렇다. 서울에서 밤기차를 타고 구례구역에 새벽 3시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성삼재로 이동. 이른 아침 성삼재에서 바로 산행을 시작하여 노고단을 시작점으로 벽소령까지 가서 1박. 둘째날은 벽소령에서 장터목까지 가서 또 1박. 셋째날 아침엔 천왕봉 일출을 보고 중산리나 백무동으로 하산하여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것이 보통 나같은 초보자들이 많이 하는 코스라고 한다. 물론 나도 이 코스를 선택했다. 오는 교통편은 예약하지 않고 상황을 보고 결정하기로.
일요일 밤. 용산역에 도착을 해서 전광판으로 열차 출발 정보를 확인하고 7번 승강장으로 내려가니 이미 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6호차 21번. 종착역은 여수Expo. 6번 객차에 올라타니 객차는 텅비어 있었다. 이대로 텅 비어서 가나 했는데 이내 사람들이 타기 시작하고 내 옆자리에도 아주머니 한분이 자리를 잡았다. 배낭 올리는 것을 도와드리고 자연스럽게 몇마디를 나눴다. 열차 출발 시간 되니 어느새 자리는 거의 꽉찼다. 내일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하려면 조금이라도 자둬야 한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지만 정신은 말똥말똥. 잔둥 만둥 뜬눈으로 세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걱정.
어느새 기차는 구례구 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 나가기 시작했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역전은 택시기사와 관광객들로 북적북적. 일단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와보니 사람들이 빠지고 몇 팀만 남았다. 성삼재까지 가는 택시는 4만원. 보통 4명을 태워서 가는데 나는 중간에 준민씨를 픽업해야 한다. 옆에 서 있던 커플에게 다가가 설명을 하고 그들과 한 차를 타게 되었다.
성삼재로 가는 길에 구례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들러서 하루 전날 부산에서 올라온 준민씨를 픽업했다. 동승한 커플은 이미 지리산에 여러차례란다. 이렇게 죽이 맞어 같이 산에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가는 내내 기사아저씨는 쉼 없이 떠든다. 전라도 사투리도 낯선데 궁금하지 않은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 꼬불꼬불한 산길에 멀미가날 지경이다. 견디기 힘들어 질때 쯤 다행히 성삼재에 도착. 원래 택시비는 4만원인데 픽업하느라 돌아와야 했다며 4만5천원을 달라고 하여 준민씨가 오천원을 더 냈다.
성삼재에 내렸는데 깜깜하다. 출발에 앞서 개인 정비. 화장실도 가고 발가락에 테이핑도 했다. 집에서 싸온 고구마를 먹으면서 4시 10분에 출발. 헤드렌턴은 있으나 마나. 산행용으로는 자전거 조명처럼 밝은 라이트가 필요하구나. 다행히 준민씨가 밝은 손전등을 가지고 와서 걷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섬삼재에서 노고단까지는 쭉 오르막이다. 완만한 오르막인데 왠걸, 초반에 힘이 다 빠졌다. 등에 맨 배낭도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갈길이 먼데 걱정이로구만.
4시 50분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다. 언제 올라온 사람들인지 사람들이 바글바글. 취사장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 우리는 자동판매기에서 달달한 다방커피를 한 잔 뽑아먹고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다시 출발.
서서히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6시쯤 되니 라이트를 끄고 걸어도 될만큼 날이 밝았다.
아름다운 지리산의 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0625 피아골 삼거리 도착.
노루목을 지나 삼도봉으로 가는 길에 반야봉을 사이드트립으로 다녀오기로. 배낭을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후딱 갔다오기로 했다.
반야봉에 오르니 드디어 뷰다운 뷰가 펼쳐졌다. 사진을 찍고 잠깐 앉아 있다가 하산.
0850 삼도봉 도착.
해가 높이 떠올라 꼬슬꼬슬한 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화개재. 토끼봉, 명선봉을 지나 1100 연하천에 도착. 여기서 점심을 먹을까 했는데 대피소가 공사중이라 정신이 없다. 다음 대피소는 2km 거리에 있는 벽소령인데 아직 시간이 12시도 안되었으니 점심을 먹고 천천히 가는게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매점은 열었다길래 가스를 사서 라면 하나를 끓여서 비빔밥과 함께 뚝딱.
돗대기 시장 같은 분위기에서 그래도 밥을 대충 먹고 다시 출발.
이제 밥도 먹었느니 힘이 난다. 열심히 걸어보자.
마지막 구간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 거리길 여러번.
1345 오늘의 종점 벽소령에 도착. 4시10분에 출발했으니 총 9시간 30분이 걸렸다.
17시 방배정까지 한참이 남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마루에서 뒹굴거리기면서 시간을 보낸다.
왠만하면 안씻는데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온몸이 끈쩍끈적. 샘물까지는 140m를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서 세수를 대충 하고 물을 받아왔다. 한 번 갔다오니 다시는 가고싶지 않다.
4시쯤 이른 저녁을 먹는다. 준민씨가 특별히 스팸을 사왔다. 산에서 먹는 완전 특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는 완전 소박한 저녁식사. 옆테이블에서 술은 물론, 고기를 굽고 쌈을 싸고 난리다. 여기까지 저것들을 짊어지고 온게 참으로 신기하다.
소박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아침에 같이 택시를 탔던 커플이 고기 몇점과 쌈을 접시에 담아서 가져왔다. 이렇게 황송할 때가.. 먹는게 좋긴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못할것 같다. 안먹고 말지.
줄을 서서 침상을 배정 받았다. 군대를 가본적은 없지만 군대 내무반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간격이 좁아서 누우면 어깨가 닿을 지경이다. 여기서 어떻게 자나 걱정했는데 중간중간 칸을 비워뒀단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좁다. 프라이버시가 전혀 없는 곳. 사람들은 모포를 받아서 깔고 덮고 자는데 모포의 위생상태를 의심하느니 나는 그냥 내 매트와 침낭을 사용하기로 했다.
대피소에서 자는 경우 침낭도 텐트도 매트도 필요 없단 얘긴데, 그렇다면 결국 사람들의 그 큰 배낭속엔 다 먹을 것이 들어있을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오늘의 일몰은 왠지 소중하게 느껴진다.
들어와 낯선 침상에서 잠을 청한다. 눈을 떠보니 21시. 머야. 다시 잔다. 다시 눈을 떠비니 23시. 머야. 일찌감치 잠을 청하긴 했지만 밤이 참 길다. 누워 있으려니 코는 계속 막히고 옆자리 여인의 코고는 소리에 눈을 꼭 감고 있어도 잠이 안온다. 밤이 길구나..
Topic: 지리산-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