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y Me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지음 | 어크로스
저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1년여간 했던 고민들을 똑같이 한 사람이 있었고, 이렇게 멋진 책을 써주셨다. 밑줄이 쫙쫙. 회사가 다니기 싫어 고민하는 중이라면 이책을 적극 추천.
- 나는 직장 생활 10년을 끝으로 직장인이기를 그만두었고, 불확실성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게 되었다. 지금은 “내 일은 ○○이다”의 빈칸이 유동하는 채로 살아가도 좋다고 생각한다.
- 우리는먹고살기 위한 욕구를, 창조하고픈 욕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일 하나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 우리에게 남은 활동이라고는 노동뿐인 이 시대에도 우리에겐 유용한 것을 창조하고, 사람들 속에서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
-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이 흥미로운 일을 하고픈 마음과 충돌하고, 안정된 일자리를 원하는 마음과 자유롭게 일하고 싶은 마음이 부딪힐 때 우리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선택이 필요하다.
- 나 역시 일해온 시간만큼 내 안의 수많은 모순된 욕망과 씨름해왔다. 일을 좋아하지만 일만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돈을 잘 벌고 싶었지만 돈이 아니라면 의미 없을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배울 것이 있는 일에 구미가 당겼지만 너무 어려워 실패가 뻔한 일은 싫었다.
- “난 왜 일에 의미를 부여했을까. 일일 뿐인데.”
- 일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좋아하는 일’을 좇도록 이끄는 것이야말로 자본의 새로운 착취 전략이라고 말한다.
- 마음껏 사랑할 것, 그러나 객관성을 잃지 않을 것, 그 일이 아니더라도 어디서건 의미 있는 일을 또 찾을 수 있다고 믿을 것, 일의 성패가 당신의가치를 말한다고 착각하지 않을 것.
- 어떻게 일을 좋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것인가, 일을 손에서 놓기 전까지 놓을 수 없는 질문이다.
- 우리는 일이 없는 삶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지만 일과 내 삶을 동일시하고 싶진 않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싶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와 모든 것을 나누고 싶진 않다. 우리는 놀듯이 일하고 싶지만 놀이 대신 일을 하고 싶진 않다. 이 사이 어디쯤에서 내가 원하는 일의 방식을 규정하는 것, 자신에게 좋은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그것이 일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 호모 루덴스
- 우리에겐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 “산속을 누비며 생전 처음 산나물을 뜯고 요리하면서 깨달았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그만큼만 되돌려 받는 것. ‘이런 게 진짜 사는 것이지 않나’.” 일단 돈을 벌면 좋다는 세상의 말을유라 역시 따르며 살아보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중요한 욕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 무슨 일을 어디서 누구와 얼마나 오랫동안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재미있는 일을 원한다면 나는 어떤 것에서 가장 큰 재미를 느끼는가? 나는 어떤 상황을 가장 견딜 수 없어하는가? 돈을 벌어야 한다면 얼마를 벌어야 하는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그것을 가장 가치있게 생각하는가?
- 구체적으로 일을 고민할 때, 내 욕망들 사이의 우선순위를 이해할 때, 그때만 우리는 일의 다른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
-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일하기 싫다’고 말하지만 싫은 것은 대개 일 자체라기보다 일이 놓인 조건이다.
- 돈벌이를 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을 무조건 좇지는 않았다.
- 일은 언제나 직업보다 크다. 직업이 타이틀이라면 일은 일상을 채우는 활동이다. 운이 좋아도 최소한 여덟 시간을 일의 활동으로 채우며 산다.
-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는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는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하게 미지의 것이다.
- 어쩌면 ‘좋아하는 일’이란 물 위에 떠 있는 부표 같은 것.
- 커리어의 기획을, 자기 일의 스토리라인 전체를 알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욕망들을 이해하고 그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과 균형을 이뤄줄 일거리의 조합을 만들려고 애쓴다. 적당한 돈벌이와 적당한 사회적 의미와 적당한 자아실현을 조합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나의 최선이다. 욕망 사이의 우선순위는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다. 그래서 내 일의 조합 역시 늘 변하고 있다.
- 예의범절과 책략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감정을 가려주는 행동
- 성숙한 진정성은 자신의 성격이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 여기에 더해 그 일의 목표와 가치를 스스로 믿고 있다면 가면 쓰기에 서글픔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
- 불편함을 극복할 수 있다면 한때 불편했을지언정 그 일이 주는 반대급부를 향한 욕망이 더 컸던 것이다
- 자신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고 믿어버린다면 정말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 물론 돈과 보람과 즐거움 모두를 원하는 만큼 주는 일자리는 세상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셋 사이의 균형점을 고민해볼 수 있어야 한다. 얼마큼의 보람을 위해 얼마큼의 돈벌이를 포기할 수 있는지. 또 얼마큼의 돈벌이를 위해 얼마큼의 즐거움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 물론 나는 운이 좋은 경우였을 것이다. 일단 부양할 가족이 줄줄이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니, 나 자신의 욕구만 곰곰이 들여다보는 것으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 사는 환경과 만나는 사람이달라지면 자연스레 욕구가 변한다.
- 돈을 버는 데 쓰는 시간이 줄어들면 일상도 다른 방식으로 재편된다.
- 한쪽에는 한 시간 동안 돈을 10만 원 벌면서 그 자체로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한 시간 동안 20만 원을 벌지만 똑같은 즐거움을 누리려면 20만 원을 써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양쪽은 똑같은 즐거움을 누렸지만 전자에겐 10만 원이 남았고 후자에겐 한 푼도 남지 않았다(이 역시 매우‘화폐적’ 계산법이기는 하다). 과연 어느 쪽의 경제적 능력이 더 큰 것일까?
- 많이 벌고 돈 많이 쓰는 삶보다 어떤 식으로든 돈 들이지 않고 놀며 사는 능력을 조금씩 기르는 것, 더 나아가 돈 들이지 않고 살 수 있는 관계망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 우리는 그저 하나의 욕구를 다른 욕구로 대체할 수 있을 뿐
- 일상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는지, 어떤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지가 우리 욕구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다른 종류의 활동을하고, 다른 종류의 관계를 맺고, 다른 종류의 경험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다른 종류의 욕구가 생길 리 만무하다.
- 구구절절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기 뭣할 때, 상대가 ‘진짜 대답’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을 때 나는 세상의 프레임에 따라 대답하는 것을 그리 꺼리지 않는다.
- 오늘날의 일반적인 가족구조는 돈벌이 노동과 가사 노동 그리고 돈벌이의 예비 과정을 한 세트로 묶어내는 단위나 다름없다
- 우리에겐 더 많은 ‘쓸데없는 일’, 잉여짓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돈과 시장을 경유하지 않고도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 더구나 직업에서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그러고서 취미에 돈을 많이쓰면 쓸수록 능력 있는 인간으로 대접받는다. 그렇게 능력 있는 인간이 되려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이 아닌 이상 ‘일’과 ‘자기 계발’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결국 취미에 들일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시간이 쥐꼬리만큼 남았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즐기는 방법은 돈 쓰는 일이기 마련이다.
- 열심히 돈을 번 다음 놀려고 돈을 쓰느니, 그냥 돈은 덜 벌리더라도 놀이 같은 일을 할 수만있다면 결국은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돈이 좀 있어야 마음껏 놀듯이 일할 수 있다는 말이다. 놀이 같은 일의 첫 번째 함정이다.
- 자발적이지 않은 것은 본질적으로 놀이가 될 수 없다.
- 모두가 ‘치열’을 부르짖고 일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세상은 갑갑하다. 6시 정시퇴근을 하려면 무언가 핑계를 대야 하고, 끝없이 열정을 불태우는 자세를 보여야 프로페셔널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도 싫다
- 내가 종지부를 찍었던 것은 ‘직장’이었지 ‘일’이 아니었음.
- 정체성이란 내가 생각하는 나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 일이 없음에도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장소에 내 몸을 가져다 둬야 한다는 사실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 그 순간 나는 내 일의 대가를 받는사람이 아니었다. 내 시간을 판 대가, 즉 내 자유의 일정 부분을 포기한 대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 내 다음 24시간조차 통제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면 무슨 재주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의 대가로 얻은 부산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 자존감이 “세상에서 자신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다는 확신”이라면 자존심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그래서 그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싶다는 욕망”이다.
- 각자가 어떤 노고를 치르는지 가족들은 직접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 가족 구성원들은 집으로 돌아와 얼굴과 몸으로 괴로움을 드러낸다. 그것조차 없다면 아무도 자신의 괴로움을 알아주지 않기때문이다
- 정확히는 많이 일한 것처럼 ‘보이고’ 많이 괴로운‘티’를 내는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보여주기 위해 쓸데없이 만들어내는 일이 난무한다. 일종의 군비경쟁인 셈이다.
- 한 사람이 떠난다고 기업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대체 불가능성이 아니라 그 기업의 무능을 확인해줄 뿐이다.
- 별것 아닌 일에도 점수를 매겨서 측정하기 시작하면 그 일이 갑작스레 중요한 일처럼 보인다
- 협동조합의 목표는 우리 삶의 목표와 닮아 있다. 우리가 삶에서 다면적 욕구를 충족하려 애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삶에서 다양한 욕구들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 ‘남들만큼’이 아니라 ‘나름대로’ 먹고살며, 시장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이면서 일해야 한다.
- 현재를 견딤으로써 미래에 더 큰 과실을 누리라는 교훈은 안정적 토대 위에서만 빛을 발한다. 오늘의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은 언젠가 더 큰 대가로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데도 현재를 희생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내가 놓인 환경의 어떤 측면도 견실히 지속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시대, 오늘을 견디라고 부르짖는 노동 윤리는 결국 당신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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