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y Me
비혼 선언
31 Ma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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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는 작년 10월에 결혼을 했고, J는 3년 넘게 만난 남자친구가 있다. 결혼에 대한 화제는 늘 우리의 안주거리다.

결혼을 안할 생각은 없지만 딱히 하고 싶지도 않다는 J에게 연애만 해라 뭐하러 결혼하고 애낳고 힘들게 사냐 했더니 J가 그런다. 결혼은 평생 내편이 있다는게 연애랑은 다른 것 같다고. 연애는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지만 결혼은 평생을 약속하는 것이니 인생의 든든한 보험같은 것이라나?

Y도 옆에서 거들길 남편은 남자가 아니라 가족이라고. 남편을 죽도록 사랑하거나 떨어져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같이 사는게 아니라, 같이 인생을 계획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의지하고 돕고 힘을 합치는 거라고. 음. 그럼 결혼은 보험이고 동맹같은 건가?

결혼은 인생의 평생 내 편, 언제든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는 동반자가 되기를 약속하는 것이다. 모두가 내편이 아닐 때 내편이 되어주는 사람. 내가 아플 때 내곁을 지켜 줄 사람. 미우나 고우나 죽을 때까지 같이 갈 사람. 그 사람을 곁에 두기 위해 나도 그러겠노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법의 형식을 빌려 가족 공동체가 되기를 약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오래 같이 밥을 먹고, 아주 오래 한집에서 살고. 아주 오래 한 이불을 덮고. 그렇게 살다가 미운정 고운정 다 들고, 사랑, 연민, 의리, 정. 그런 것들이 골고루 잘 뒤섞여서 어느 순간엔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믿어버리게 되는 것. 그런거 같다 결혼해서 가족이 된다는건.

누군가 나를 챙겨주고 필요할 때 옆에 있으면 좋겠지.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내 곁에 오래 있어주면 좋겠지. 언제나 내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건 단순히 외롭거나 심심할 때 옆에 있어주는 누군가랑은 다를 것이다.

든든함. 동반자. 동맹. 다 좋다. 하지만 이 좋은 것들을 누리기 위해선 댓가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내 편이 되어주길 원한다면 나도 그의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길 원한다면 나도 그에게 의지가 되어줘야 한다. 누군가 나의 노후를 돌봐주길 원한다면 나도 그의 노후를 돌봐주어야 한다. 누군가 평생 나만 사랑해주길 원한다면 나도 평생 한눈 팔지 말아야 한다. 보험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일종의 보험료랄까.

동맹을 맺든 보험료를 치르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평생 보장된 혜택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보험료를 치를 수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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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의 좋은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책임도 딸려 온다는 것을 아주 일찍 알았던 것 같다. 20대 말에 친구들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씩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왜 구지 결혼을 하는지가 여전히 의문이었기에 그들이 부럽다기 보다는 의심스러웠달까.

화창한 주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멜번 시티를 가로지르는 붐비는 트램안에 서 있었다. J군에게 전화가 왔다.

– 나 결혼한다. – 왜?

왜냐니. 친구가 결혼을 한다는데 축하는 못해줄 망정 왜냐니. 그러고보니 내기에 이겼으니 축하받을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J군은 고등학교 때 만나 청춘을 함께 한 male friend 다. 숱하게 술을 마시고 참 별 주접을 다 떨었는데 그 중 하나가 누가 먼저 결혼을 하냐에 대한 내기였다. 우린 둘 다 결혼을 안할거라고 했는데 아이고 퍽이나 안하겠다, 웃기고 있네, 어디 니가 안하나 보자며 서로를 까대다 결국 내기를 걸었다. 둘 중에 먼저 결혼 하는 사람이 지는 거고,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을 신혼여행에 데려가거나 2천만원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호프집에서 종이 쪼가리에 각서를 써서 나눠가졌고 그날까지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

난 내기에 이겼지만 신혼여행에 따라가겠다고 하지도 않았고 2천만원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진심으로 궁금했을 뿐이다. 이새끼가 왜 결혼을 하는건지.

아 그 전에도 결혼을 조건으로 이런 식의 내기가 한 번 더 있었는데 졸업한지 얼마 안되서 대학교 친구들을 만난 자리였다. 역삼동 카페에서 상현, 지영과 함께 결성한 영국계. 이 친구들도 자기네들은 결혼을 안한다고 했고 서로 웃기고 있네, 두고 보자, 너나 해라를 반복하다가 제일 먼저 결혼하는 사람이 나머지 두명을 영국에 보내주기로 약속했었다. 물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대학때부터 남자친구가 있던 상현이가 가장 먼저 결혼 소식을 알려왔고, 지영과 나는 우리 영국가는거야? 라며 키득거린게 영국계의 끝이었다.

이미 어릴때 당당히 비혼을 선언했던걸 보면 난 결혼이 무척 피곤한 제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구지 왜 해야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이가 찼으니까, 부모님이 원해서, 남들이 다 하니까, 왠지 해야할 것 같아서, 늙어서 외로울까봐. 아무것도 내겐 설득력이 없었다.

결혼은 당연한 것도 아니고, 나이가 되었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남들이 하니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원해야 한다. 죽도록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어떤 결과라도 책임 질 준비가 되었을 때. 즉 결혼을 함으로써 딸려오는 것들 – 배우자의 가족들. 출산. 육아등. 이 모든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희생하고 책임질 수 있을 때 해야한다.

특히나 결혼 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출산. 하지만 결혼과 출산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그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완전히 다른 스토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출산은 결혼 후에 당연히 와야하는 이벤트가 아니다. 생겼다고 낳을 일이 아니라 생기기 전에 둘이 손 꼭잡고 고민해야 한다. 진짜 원하는 것인지 그 선택을 책임질 준비가 되었는지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해야 할 일이다.

인생에 유일하게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그것과도 비교할 수도 없는 중차대한 선택이다. 결혼은 취소하면 되고 문신은 지우면 되지만 태어난 아이를 취소하거나 돌이킬 수는 없다. 키우다가 힘들다고 그만둘 수 있는것도 아니다. 부모란 평생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책임이다.

아. 나는 물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자신이 없고, 어느날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괴롭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책임을 지려면 통제가 가능해야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을 책임 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보는게 맞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곧 통제할 수 없는 일을 책임져야하는 것과 같다.

안해보고 어떻게 아냐고? 우리 엄마가 생전에 늘 하셨던 말.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 아.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절대 하고 싶지 않다. 내 인생에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된다.

나는 결혼이 주는 안정과 행복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에서 자유롭고 싶기 때문에 비혼을 선택했다. 보험료를 내지 않고 보험 혜택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갑자기 죽을만큼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서 그 무거운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고 싶어질 때. 그런 날 나는 결혼이 하고 싶어지겠지.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뭐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