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컷 자고 6시 알람에 눈을 떴다. 텐트 오른쪽으로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텐트를 열어 재끼고 밖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자전거를 체크. 밤새 자전거는 무사했다.
어제 밤 경황중에 와서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넓은 주차장 뒷편 소나무 밭에 있는 야영장. 저멀리 보이는 바다. 음 이런 풍경이었구나.
바닷가로 나가 아침 산책을 했다. 휑하니 넒은 바다에 사람이 없었다. 혼자서 이렇게 아무도 없는 외진 야영장에서 잤구나. 역시 몰라야 용감하다.
오늘은 오후 늦게 비소식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캠핑은 못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해야 할 듯. 잘하면 서귀포시까지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계획 따윈 없으니 되는대까지 달려보고 결정하기로.
해가 떠올라 텐트가 마르길 기다렸다가 짐을 정리하고 출발했다. 떠나기 전 바닷가 주변을 둘러보고 큰길로 나와 마트에서 물을 샀다. 배도 고프지 않고 아침은 여전히 생각이 없었다.
잠깐 찻길 옆으로 나 자전거 도로를 달리다가 귀덕에서 해안도로로 들어갔다. 바로 옆에 바다를 끼고 달리니 이제야 제주도를 달리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비양도가 보이는 협재까지 달렸다. 날씨도 좋고 바다 색깔도 예쁘고 지루한 줄 모르고 신나게 달렸다.
유명한 협재 해변에는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바글바글. 사람들을 구경하며 백사장에 깔아놓은 거적대기 위로 자전거를 끌고 걸었다. 바람이 부니 모래가 날렸다.
해변을 걸었다. 바다가 보이는 정자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앉아서 바다를 구경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길래 사진도 한장 부탁했다. 이번 제주 여행의 유일한 독사진. 나와 내 자전거와 제주가 나온 맘에 드는 사진.
바로 옆의 금능해변. 또 멈춰서서 해변을 걸으며 다음에 오면 어디에 캠핑을 할지도 봐뒀다. 다시 출발.
달리다가 차귀도 쪽 해안도로로 접어 들었다. 바다낚시를 하는 곳인지 낚시배가 즐비하고 관광버스도 여러대 보였다. 바닷가에는 한치를 파는 작은 상점들과 그곳에 앉아 멍때리고 계시는 할머니들. 어딜가나 할머니들이 억세게 일을 하는 것 같다.
이쯤에서 점심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눈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지만 문이 잠겨있었다. 다른 레스토랑을 찾아 가 들여다보니 안에서 야구를 보시던 아저씨 문을 열고 나왔다. 식사 되나요? 네. 메뉴가 썩 맘에 들진 않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해물 뚝배기. 문제의 해물 뚝배기. 자리를 잡고 앉으려니 부스스한 차림의 배가 불룩나온 임산부가 눈꼽을 떼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온 음식은 예상대로였다. 밑반찬은 참으로 볼품이 없는데다 해물 뚝배기엔 살이 없는 조개만 이백개 정도 들어있는.. 그야말로 국물밖에 먹을게 없었다. 이런 씨. 조개를 건져내다보니 욕이 나왔다. 애초에 맛집 따위엔 별 관심도 없었지만 여긴 정말 심했다. 이 해물 뚝배기를 먹고 낸 만원이 제주도 가서 쓴 가장 아까운 돈이다.
맛대가리 없는 점심을 꾸역꾸역 먹고 밖으로 나와 다시 출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음악을 크게 틀고 지나가는 자전거 한대. 오르막을 올라가니 그 자전거가 딱 서있었다. 마치 내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 만나는 자전거 탄 사람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잠시 나누고 같이 출발. 이분은 마라도를 거쳐 삼방산까지 가신다고 했다. 같이 달리며 얘기하다 보니 전국 방방곡곡을 자전거로 안다닌 곳이 없는 자전거 여행 전문가였다. 고수를 길에서 만나다니.
지루하던 길에 말동무가 생겼다. 당연히 자전거 얘기를 주로 나눴다. 아저씨도 제주도 일주를 끝내고 목포로 가서 영산강 섬진강 종주를 하실 예정이라고 했다. 코스가 같으니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계산을 해보니 페이스가 달랐다. 오늘 아침 같은 시간에 출발했는데 나보다 20km 정도를 더 달리신 정도, 그것도 아주 천천히 놀면서 오신거라고 하니 방향이 같다 한들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싶었다. 한동안 같이 달리다가 오버 페이스인것 같아 먼저 가시라고 보내드리고 나는 다시 내 페이스로. 특별할 것 없는 조용한 해안도로. 맞바람이 더 세진것 같았다.
모슬포항을 지나고 1330분 쯤 송악산에 도착했다. 송악산은 꼭 가보고싶은 곳이긴 했지만 오늘은 갈길이 머니 다음에 다시 오는걸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이 너무 많았다. 나중에 제주에 오게되면 조용한 아침에 와보리라 생각하며 호박엿만 사먹고 좀 쉬었다가 출발했다.
산방산을 지나고 중문까지는 해안도로가 아닌 도로로 달렸다. 뷰도 없고 재미도 없고 오르막에 바람까지 불었다.
중문까지 그냥 열심히 달렸다.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서 지루하진 않았지만 바람도 심하고 점점 체력이 떨어져갔다. 4시쯤 되어서 중문 도착했다. 그나저나 중문의 상징 야자수가 왜 다 시들은거임? 실망이야.
서귀포시에 가면 가려고 했던 게스트하우스에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해보니 자리가 없다고 했다. 서귀포 시내로 들어가면 복잡할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숙소 찾아 헤맬 것 같아 오늘은 중문에서 숙박 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주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검색. 자전거 도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샬레 게스트하우스가 딱 걸렸다. 전화를 해보니 방 있으니 오란다.
중문 관광단지를 막 벗어난 곳에 있는 샬레 게스트하우스. 자전거를 세우고 있으려니 주인 아저씨가 차를 몰고 등장하셨다. 자전거를 숙소 안쪽 베란다로 들여 놓고 체크인. 전체적으로 어수선하고 촌스런 분위기지만 정감이 가는 분위기였다. 16천원을 내고 안내 받은 방은 6인실. 독차지.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고 넓은 방을 혼자 쓰니 뭘 더바라리오.
제주 자전거 여행의 좋은점은 어딜가나 편의점이나 수퍼가 있어서 식량 조달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 짐을 부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숙소 바로 앞이 무슨 관광지인지 중국인들을 실은 버스가 수도없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어슬렁 거리며 골목길을 걸어 마트에 가서 오늘 일용할 맥주와 군것질 거리를 샀다.
숙소로 들어온 건 비가 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충전 때문이었다. 어딜 가나 핸드폰과 GPS가 문제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해두고 중문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베란다에 자리를 잡았다. 뷰가 나이스다. 밖으론 간혹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달리는 자전거 여행자들이 지나갔다. 바람을 맞으며 한잔 뙇! 음 바로 이거야. 오늘도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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