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도 쓰러져잤다. 아니 술이 취해 잤다고 하는게 맞겠지. 이 여행해서 유일하게 내가 누리는 호사는 맥주를 맘껏 마시는 것.
5시반 쯤 눈을 떠서 누워서 어제 찍은 영상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막둥이가 일어나 언니랑 모닝 쇼핑을 가기로 했다며 숙소를 나섰다. 저 둘이 저렇게 부지런을 떠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대단한 걸 사는 것도 아니다. 자매들이 이렇게 열정을 내는 품목은 1유로도 안하는 핸드크림, 요거트, 젤리 나부랭이 같은거다. 나에겐 없는 쇼핑 열정이다. 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영상을 정리해 유튜브에 올리고 나니 솔이도 깼다. 창문을 열어보니 군데군데 파란 하늘. 날이 개려나. 어제 그렇게 잔뜩 쌓여 있던 눈도 많이 녹았다.
7시도 안되서 나간 언니랑 막둥이가 9시가 다 되어서 돌아왔다. 열 군데가 넘는 샵을 뒤져서 사온 요거트를 12개나 사왔다. 저 요거트 정말 맛있긴 했다. 내 몫의 핸드크림과 치약도 사왔다. 굿 보고 떡 먹기란 바로 이런 것.
오늘은 체코로 이동하는 날. 기차를 5시간이나 타고 가야한다. 그래도 비행기보다 기차가 훨씬 낫다. 바깥 풍경도 볼수 있고 돌아다닐 수도 있고 비행기에 비해 공간도 넉넉하다.
크로아상과 요거트로 아침을 먹고 10시에 체크아웃을 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기차역에서 티켓을 현장 구매 해야한다. 어제와는 다른 자판기라 한참 헤매다 간신히 바이에른 뵈멘 티켓을 찾았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어제 바이에른 티켓을 샀던대로 동반시 무료로 간주, €50.30을 주고 성인 4인용 티켓을 끊었다.
시간 맞춰 플랫폼에 가보니 앞쪽은 Hof라는 곳으로 가는 기차, 뒤쪽은 프라하Prague 가는 기차. 우리의 2등석은 C부터라고 해서 한참을 뒤로 걸어갔다. 1등석의 새끈한 열차에 비해 2등석은 객차가 무척 낡아보였다.
뒤쪽으로 가면 신형 열차칸이 있을까 해서 뒷쪽으로 가고 있는데, 앞쪽에서 6인 컴파트먼트 형 객차에 올라탄 예자매가 거기에 눌러 앉았다고 톡이 왔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열차라며 신이 났단다. 아늑하긴 한데 테이블도 없고 한 두시간도 아니고 5시간을 넘게 가야하는데 무릎이 닿는 이 구조는 영 불편할 것 같았다. 한 번 앉아본 걸로 만족, 다른 넓은 좌석이 있는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5시간 30분의 기차 이동. 어제는 좋아 죽겠다던 창밖의 눈 풍경도 이제 시들어졌는지 다들 이내 잠이 들었다.
그나저나 난 티켓을 제대로 산건지 확신이 없었다. Bahn 홈페이지에 가서 살펴보니 왠지 잘못 산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찬찬히 읽어보니 성인 2인용 티켓을 사면 동반 아동은 무료이지만, 우리는 성인 4인용 티켓이라서 아이들이 무료가 아니라는 것이 요지였다.
역시나 검표원이 와서 표를 검사하는데 딴지를 걸었다. 모르고 그랬다, 어젠 성인 4인용 티켓이었다,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 놓으니 듣기 귀찮았는지 됐다고 티켓에 이름이나 쓰라고 하고 사라졌다.
매를 맞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창밖으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눈도 비도 오지 않는 이런 날씨 오랜만이네. 편하게 밀린 일기를 쓰고 꽃할배 프라하 편을 잠깐 봤다. 아침에 기차역에서 각자 산 서브웨이로 점심을 해결했다. 창밖 풍경이 보여서인지 자리가 넓어서인지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열차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나는 기차가 제대로 프라하로 가고 있는지 지도를 몇 번 확인했다. 제대로 가고 있었다. 보초를 서는 기분으로 내내 깨어서 갔다.
열차는 체코 국경을 넘었다. 예상대로 체코 철도청 소속의 검표원이 등장했다. 우리가 가진 티켓은 플젠Pilsen까지 갈 수 있는 티켓이라 플젠부터 프라하까지의 남은 구간은 따로 티켓을 사야했다. 인원을 체크하더니 6살 꼬맹인 무료고 나머지 5인에 560코루나라며 기계에서 영수증을 끊어줬다. 검표원은 상냥하고 친절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체코 프라하
체코에 도착. 4시 반에 해가 떨어지니 바깥은 이미 어두워졌다. 번잡스러운 기차역에 내려 일단 ATM에서 현금을 찾고 각자 임무를 맡았다. 언니랑 겨울이는 숙소 키를 픽업하러 가고, 나는 노약자를 숙소로 모시는 일을 맡았다. 이렇게 해야했던 이유는 숙소와 오피스가 한참 떨어져 있기 때문. 오피스는 숙소에 가는 길에 있었지만 이런 날씨에 노약자들이 걷기엔 먼 거리였다.
노약자들을 버거킹에 넣어두고 어디서 우버를 불러야 할 지 기차역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시끄럽고 복잡한 공간에서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잔뜩 쓰여진 표지판을 보니 짜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런 순간 딱 질색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여행의 일부. 마침 언니가 키를 찾아 숙소로 출발했다고 연락이 왔다.
픽업 장소가 애매했지만 어쨌든 우버를 불렀다. 게이트 앞에 있다고 했는데 차가 지나쳐 가길래 노약자를 끌고 100미터 정도를 걸어 주차장 앞으로 갔다.
우버 기사가 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았다. 짐을 트렁크에 싣는데 바퀴에 눈이라도 한 덩어리 붙어 있을까 안절부절. 차에 타는데 자기가 문을 닫아 준다고 하길래 뭔 소린가 했다. 그 말을 못들은 딸기가 차 문을 닫았더니 꿍시렁 거리며 다시 문을 열었다 닫는다. 잉? 이건 뭐 강박증인가? 차에 타더니 이번엔 나한테 ‘여기가 픽업 포인트야, 알겠어?‘란다. 왜 자기를 게이트 앞으로 오랴고 했냐 이거다. 이 양반 우리가 인원이 많아서 화 났나. 인원이 많으면 대놓고 싫어하는 우버 기사도 있길래 ‘ok’하고 말았다.
더 웃긴 일은 도착해서다. 내 폰에 우버 결제 설정이 현금으로 되어 있었고, 요금이 90코루나 정도가 나오길래 100코루나를 내고 나머지는 팁으로 주면 되겠거니 했는데 요금이 101코루나가 나온거다. 여러번 우버를 탔지만 부를 때 요금과 내릴 때 요금이 다른 경우는 처음이었다.
1코루나 정도는 깎아주겠지 하는 마음에 100코루나를 건네며 플리즈 모드로 ‘Sorry I only have 200 note.‘라고 했더니, 돈을 휙 가져가며 쳐다도 안보고 ‘Change!‘란다. 바꿔오란 애기다. 기가 막혔다.
1코루나. 한국돈으로 50원. 그정도는 기분 좋게 깎아주면 좋잖아. 이런 꽉 막힌 인간 같으니. 아 씨 돈 없다고 할껄. 200코루나는 왜 있다고 자백한거야. 있는 돈을 안주겠다고 할 수도 없고 이런 인간에게 50원을 깎겠다고 살랑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오기가 생겼다. 오냐 바꿔오마. 여기서 기다려라. 노약자와 짐을 숙소로 올려 보내고 앞에 있는 담배 가게에 가서 물어보니 잔돈 없댄다. 슈퍼도 보이지 않았다. 아 썅.
기사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청소하고 발매트를 털고 난리가 났다. 차를 저렇게 사랑하는데 아까워서 어떻게 타고 다니나 싶었다. 정상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서두를 건 없었지만 혹시나 이 정신병자 같은 놈이 숙소로 쫓아 올라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마침 환전소가 보이길래 들어가 잔돈 좀 바꿀 수 있냐고 했더니 자기넨 통화간 환전만 한댄다. 아 체코 사람들 참 유도리가 없네. 알았어 10유로만 바꿔줘. 잔돈을 바꿔 숙소 앞으로 갔더니 차는 사라지고 없다. 아 썅 별 거지같은 놈이 걸려가지고 피곤케 하네. 아 체코 별로야.
궁시렁 거리며 숙소에 올라와 짐을 부렸다. 두 주부는 먹이를 구하러 나갔고 나는 남은 쌀로 밥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오버트라운 김밥 이후 3일만에 처음 먹는 쌀이었다. 그동안 아무도 쌀을 먹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린 유럽 체질인가보다.
쏘세지와 국을 끓여 저녁을 먹고 각자 자유시간을 가졌다. 솔이랑 겨울이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막둥이가 사다 준 맥주를 마시다가 야경을 보러 나섰다. 숙소 위치 하나는 기막히게 좋았다. 까를교가 바로 골목 끝이었다. 보도블럭 사이에 눈이 끼어서 길이 맨들맨들했다. 야경은 좋았지만 밤이라 그런지 강가라 그런지 술이 취해 그런지 추웠다. 일단 철수.
숙소 근처의 구멍가게에 물을 사러갔다. 언니랑 겨울이랑 들어가고 나는 밖에 서 있었다. 선반에 올려진 에비앙의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95코루나. 오늘 새로 만난 코루나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 싼지 비싼지 아직 잘 모르겠다. 95코루나면 얼마야. 100코루나가 5천원이니, 1.5리터 물 한병에 5000원이란 소리다. 아 물 드럽게 비싸다 생각하고 있는데 언니가 그 에비앙 6개를 껴안고 나오는 거다. 응? 설마? 우리 언니가 미치지 않고서야 5천원 짜리 에비앙 여섯개를 샀을리 없다. “그거 산거야?” “어?… ” 다행히 가게 문을 나오기 한 발자국 전이었다.
언니도 체코 화폐에 대한 감이 없는 상태에서 헷갈렸던 거다. 어떻게 계산을 했는지 물 6개에 한국돈 5000원이란 계산이 나와서 가격은 똑같으니 이왕이면 에비앙을 마시자고 들고 나오려고 했단다. 지갑을 열고 돈을 내는데 순간 무의식적으로 멈칫하긴 했단다. 꽃할배에서 김용건이 택시비 5천원 나온걸 5만원을 줬었는데 딱 그꼴이었다. 나중에 알았으면 여행 내내 배 아팠을텐데 다행히 들어가 바로 환불을 했다. 내 평생 처음으로 3만원어치 물을 마실 뻔 했던 일은 즐거운 웃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웃음은 잠시. 숙소에 올라와 영수증 정리를 하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10유로를 환전하는데 수수료를 떼간거다. 10유로 250코루나에서 무려 55코루나를 떼갔다. 이런 도둠놈의 쉐끼들! 1코루나 때문에 50코루나를 날린거다. 맥주 마시고 기분이 좋아졌는데 다시 짜증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우버 기사의 50원 어치 불친절도 충분히 기분이 나빴는데 환전소에서 2500원을 뜯긴 것을 알게 되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깎아달라고 할 걸 괜히 그랬나 싶기도 했다.
금액을 떠나 50배라는 상대적인 숫자가 불쾌했다. 50배의 바보짓을 한 것 같았다. 정확한 요금을 요구한 우버 기사 잘못도 아니고, 환전 커미션을 떼는 것도 불법이 아니다. 사기를 당한 것도 아니고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내 선택이었다. 문제라면 홧김에 한 선택이었다는 것. 그렇다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달라졌을까? 내가 살랑거리며 좀 깎아달라고 했으면 깎아줬을까? 더 불쌍하게 잔돈 좀 바꿔달라고 했으면 바꿔줬을까? 아님 내가 더 젊고 예뻤으면 달랐을까? 모르겠다. 잘 풀렸을 수도 있고 안풀려서 더 기분이 나빠졌을 수도 있다. 하지 않은 선택의 결과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오늘 체코는 별로다.
TLTR
- Day11 2019년 1월 11일 뮌헨에서 기차타고 5시간 이동 체코 프라하로. 별로였던 프라하의 첫날 밤 (사진)
- 지출
간식 및 쇼핑 €43.61
바이에른 뵈멘 티켓 €50.30 기차 요금 (플젠에서 프라하까지) €22.40
우버 (기차역에서 숙소) 100.00 Kč
프라하 찰스브리지 아파트 3박 €273.00 6인 저녁거리 쇼핑 200.00 Kč
Topic: europe-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