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저자 : 김하나,황선우
-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 분류 : 810 한국문학
- 날짜 : 7/05/2019
이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곽정은 작가의 <혼자여서 괜찮은 하루>와 거의 동시에 나의 리스트에 들어왔던 책이다. 한 권은 혼자 예찬, 한 권은 둘 예찬. <혼자여서 괜찮은 하루>는 서울에 가자마자 읽었지만, 이 책은 왠지 쉽게 만나지지 않았다.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잊고 있었는데 어느날 책이 내게 왔다. 읽고 싶었던 책이 손에 들어왔을 때의 그 설렘. 그래서인가. 어쩜 글을 이렇게 술술 읽히게 잘 썼을까.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정말 단숨에 읽어버렸다.
김하나, 황선우. 7677 또래다. 같은 부산 출신에 같은 학교 출신. 술, 음악, 책 등 여러가지로 공통점이 많았던 두 사람은 서로의 닮은 점에 이끌려 친해지고 결국 함께 살게 된다. 물론 이 책의 백미는 그 이후의 이야기다. 같이 살면서 알아가게 되는 것들, 둘의 공통점 만큼이나 다양한 둘의 다른 점들을 발견하게 되고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닮았지?’ 에서 ‘둘이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로 옮겨가는 과정들이 재밌고 유쾌하다. 둘은 서로 다름을 인정했지만, 여전히 함께 살기를 원하고, 함께 살기를 즐긴다.
나도 누군가와 같이 살아본 적이 있다. 돌아보면 그건 그저 공간을 공유하는 삶이었다. 공간 공동체. 함께 사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서 함께 살고 필요하지 않으면 언제든 해체된다. 공간을 공유하는 공동체에선 마음은 공유하지 않는다. 마음을 공유하지 않으면 모든게 쿨하다. 함께 정한 몇 가지 규칙만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 다툴 일도 없다. 최대한 부대끼지 않는 것, 그것이 룰이었다. 가끔 이슈가 생길 땐 도의적 사과만 있을 뿐, 상대방의 깊은 감정을 케어할 필요도 없다. 가능하면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생활도 각자다. 냉장고도 따로 쓰고, 밥도 따로 먹고, 잠도 따로 자고, 아주 가끔 함께 한다. 그것은 공간을 반으로 가르고 ‘넌 여기 난 저기, 넘어오면 안돼’와도 같았다. 서로에게 관심도 없고 관심을 바라지도 않는, 아니 관심이 오히려 참견으로 느껴지는 원거리 동거자. 같이 살지만 따로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의 동거엔 친밀함이란 없었다. 나는 대부분의 ‘함께 삶’을 그렇게 살아왔다.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내 라이프 스타일과 프라이버시가 더 중요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좋았다. 영역의 경계가 애매한 것도 싫었고,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싫었고, 룰이 망가지는 것도 싫었다. 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였을 뿐, 난 하우스 메이트와 내 삶을 공유할 생각은 1도 없었다.
황선우와 김하나는 다르다. 혼자 꾸려오던 살림을 합치고, 자식같은 고양이를 합치고, 삶아온 삶을 합치고 그것을 조율해 나가는 과정에 공을 들인다. 때로는 찌질하지만 인간적인 서로를 인정하고,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화해한다. 각자의 삶을 살지만, 교집합은 아낌없이 누리고 즐긴다. 시답잖은 농담에 웃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함께 춤을 춘다. 서로의 생활 동반자로써 서로를 존경하고 응원하며, 하루에 한 곡씩 음악을 쌓아가며 함께 꿈을 꾼다.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손을 뻗으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다. 서로의 부모로부터 의무 없는 호의를 누리고, 친구를 공유한다. 경계가 없고 핑계가 없다.
사람은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지만 자신의 세계에 누군가를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은, 서로의 감정과 안녕을 살피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우고, 곧 화해하고 다시 싸운다. 반복해서 용서했다가 또 실망하지만 여전히 큰 기대를 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교전 상태가, 전혀 싸우지 않을 때의 허약한 평화보다 훨씬 건강함을 나는 안다.
그들은 안다. 관계에서 허약한 평화보다 건강한 싸움이 낫다는 것을. 싸움 예찬은 단순한 동거인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서로의 인생의 파트너로써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과 신뢰가 글의 곳곳에 묻어났다. 부러웠다. 행복한 두 사람이 만나서 행복이 배가 되는 삶. 둘은 친구이지만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계를 누리고 있었다. 그 어떤 결혼 생활 보다 행복해보였다. 이런 마인드의 파트너라면 함께 살아볼만도 하겠다 싶었다.
싱글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조건은 의식주 다음으로 동네 친구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쉽지만 회사 사람들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지는 않은 퇴근길에 부담없이 밥 먹을까 청할 수 있는 친구, 맨얼굴에 추리닝 바람으로 뒹굴거리다가도 겉옷만 걸치고 나가 한잔하고 쿨하게 헤어질수 있는 친구, 한 마디도 하지 않아서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린 것 같은 주말에 동네 극장에서 같이 영화를 보고 감상을 떠들 수 있는 친구, 따릉이 정류소에서 만나 자전거를 타고 슬슬 공원 한 바퀴 돌고 올 수 있는 친구. 도보 15분의 생활 반경 안에 이런 존재가 있을 때 삶은 훨씬 상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친구는 원한다고 해서 생기기도 않으며, 소개팅으로 만날 수도 없다. 근거리에 있는 만남 상대를 추천해주는 데이팅 앱도 친구를 알아보는데 쓸 용도는 아니다. 우연히 서로의 거주지가 가깝다 해도 각자 주량이 어떤지, 얼마나 외로움을 쉽게 견디며 어떨 때 타인을 필요로 하는지, 친구보다 애인을 우선하지는 않는지, 야근은 얼마나 잦은지 등 다양한 변수가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이런 동네 친구는 상상속의 동물 유니콘 같은 존재라고 전해져온다. 그런데, 우리집에 유니콘이 산다.
사실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그들이 함께 누리는 동네 친구였다. 김하나와 황선우를 둘러싼, 그들이 ‘사회적 정서적 안정망’이라고 부르는, 김민철과 황주영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 (하도 자주 들어서 이제 내 친구같다) 멀리 있는 죽마고우보다 가까이 있는 동네 친구가 나은 법. 난 누군가와 같이 살기 보다는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가 가까이 살았으면 한다. 언제든 가볍게 술과 음식과 책을 나누고, 필요할 땐 내 고양이들을 부탁할 수 있는 믿음직한 친구들. 가족을 핑계로 울타리를 세우지 않고 모두가 친구가 되어 함께 누리는 삶.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그들은 가졌다.
부럽다라는 단어가 자주 떠올랐지만 나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내가 얼마나 아쉬워하고 있는지를 몰랐다. 모두가 삼삼오오 즐거워 보이는 바닷가를 걸으며 느낀 쓸쓸한 기분은 그것 때문이었다. 너저분하고 스산한 평행우주에서 쓸쓸히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다 내 부덕의 소치다.
물론 어느정도의 각색을 했겠지만, 어쨌든 함께를 예찬하는 이 책은 성공했다. 혼자력이 만랩인 나를 이렇게 잠깐이나마 외롭게 만들었으니. 하나가 둘의 행복을 부정할 수 없다. 둘이 하나의 행복을 부정할 수도 없다. 혼자서도 행복해야 둘이서도 행복하다. 행복한 각자가 모여야 행복한 함께가 되니까.
- 허기와 식욕을 추진력으로 도약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뛰어넘는 순간을 한 번 경험해보면 혼밥은 어렵지 않고 즐길 만한 것이 된다.
- 어느 미술관에 들러서 전시를 볼지, 어는 유적니는 패스할지, 빠르게 지르는 직선 도로로 갈지 풍경을 위해 둘러서 해안도로를 선택할지 신손하게 판단하는 동시에 움직이면서 쾌감을 느끼곤 했다. 그즈음의 나는 믿고 있었다. 혼자는 질서와 닮았다고. 빠르고, 편하고, 아름다운 것.
- 나는 혼자라서 못하는 일이 있는게 싫어서 뭐든 혼자서도 해왔고 또 꽤 잘 해왔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상에는 여럿이 해야 더 재밌는 일도 존재한다는 걸.
- 어떤 차이는 이해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 나는 김하나를 통해 세상에 딸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대체로 잊어버리고 살다가 같이 장을 볼 때마다 새롭게 놀란다. 그리고 한 알 한 알 먹어치우는 동안 의아하다가 조금 슬퍼진다. 어떻게 이런 게 맛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데 있어 꼭 같은 걸 좋아해야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고 해서 꼭 가까워지지 않듯,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곁에 두며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자신과 다르다 해서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평가 내리지 않는 건 공존의 첫 단계다.
- 비슷한 점이 사람을 서로 끌어들인다면, 다른 점은 둘 사이의 빈 곳을 채워준다. 참 다른 김하나와 함께 살면서 나는 조금은 욕심이 줄고, 얼마간 정돈되었고, 약간은 느긋해졌다(고 믿고 싶다). 이렇게나 다른 나와 같이 살아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내게 그렇듯이 김하나에게도 때때로 찾아오면 기쁘겠다. 과육이 단단하고 탱글한 육보라든가 달콤하고 새콤한 향이 조화로운 죽향 같은 딸기 종류를 새로 알게 된다거나, 치킨을 먹을 때 내가 좋아하는 다리, 김하나가 좋아하는 날개와 목을 서로 양보라는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나눠 먹는다거나, 그런 작은 여백이 채워지는 것처럼.
- 관계에서의 의무는 지지 않지만 자식의 옆에 있어주어 든든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위치라면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는 일도 얼마나 산뜻하고 가뿐할까?
- 결혼 안 한 나를 두고 무슨 결격 사유가 있다는 양 비아냥거리거나 내가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둘 말고도 많았다. 백번 양보해서 그게 사실이라 쳐도 그런 얘기를 사람 앞에다 두고 할 수 있는 무례함이 놀랍고, 그렇게 무례한 사람들도 결혼을 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 자취와 독신의 구분. 아무도 정해주지 않는다. 당신이 어느 날, 스스로의 생활을 ‘독신’으로 바꾸어 부르는 순간까지다. 그 이전의 생활은 제각각인 수건들의 시기와도 비슷하다. 어찌어찌 시작되었고, 시작되었으니 그럭저럭 이어진다. 내 생각에 자취와 독신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지금의 생활을 ‘한시적’인 것으로 여기느냐 ‘반영구적’인 것으로 여기느냐인 듯하다.
- 전에는 어느 정도 서랍이나 장 안에 들어 있어그 규모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던 물건들의 실체가 거대한 산이 되어 내 눈앞에 실시간으로 쌓여갔다. 경주에 가면 볼 수 있는 대왕릉 같았다. (…) 전 지구적인 스케일의 맞닿음이 그대로 시각화된 그곳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의 동거는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이 충돌하는 것 같은 일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서로의 비슷함을 발견하고 놀라워했지만 이후로 서로의 다름을 깨달으며 더 크게 놀라게 되었다.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었다. 그것도 매일매일 끝없이 들고 나는 파도처럼 이어질 ‘생활습관’이라는 거대한 영역에서.
- 싸움의 기술. 진심을 담아 빠르게 사과하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 입으로 확인해서 정확하게 말하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려 어떨지 언급하고 공감하기.
- 이 싸움의 목적이 뭔지 생각해본다. 나의 가장 잘 드는 무기를 찾아 쥐고 한 번에 숨통이 끊어지게 적의 급소에 꽂는 것인가?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흠씬 두들겨 패서 밟아버리는 것인가? 함꼐 사는 사람, 같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과의 싸움은 잊어버리기 위한 싸움이다. 삽을 들고 감정의 물길을 판 다음 잘 흘려보내기 위한 싸움이다. 제자리로 잘 돌아오기 위한 싸움이다.
- 사람은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지만 자신의 세계에 누군가를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은, 서로의 감정과 안녕을 살피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우고, 곧 화해하고 다시 싸운다. 반복해서 용서했다가 또 실망하지만 여전히 큰 기대를 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교전 상태가, 전혀 싸우지 않을 때의 허약한 평화보다 훨씬 건강함을 나는 안다.
- 동거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서로 라이프 스타일이 맞느냐 안 맞느냐보다, 공동 생활을 위해 노력할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을 것 같다. 그래야 갈등이 생겨도 봉합할 수 있다. (…) 함께 산 지 2년쯤 지난 지금 우리는 거의 싸우지 않는다. 그동안 서로가 서서히 내려놓은 것은 상대를 컨트롤 하려는 마음이다. 대신 둘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집의 모습과 상태, 또 각자가 확보하길 원하는 독립적인 시공간을 정확히 얘기하고 그것을 함께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상대를 바꾸려 드는 것은 싸움을 만들 뿐이고, 애초에 그러기란 가능하지도 않다. 둘이 함께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게 바로 단체 생활에 필요한 팀 스피릿이다.
-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밥을 얻어먹는 사람은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감별하는 사람이 아니다. 비평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 음식에 돈을 지불할 때밖에 없다. 그 경우에만 음식에 비해 가격이 적정한지 말할 자격이 생긴다.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은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한 고귀한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다.
- 혼자를 잘 챙기는 삶은 물론 바람직하고 존경스럽다. 그러나 역시 남에게 해주는 기쁨을 누리는 삶이 더 재미있고 의욕적인 것 같다.
- 사실 가장 든든한 건 이 컨설턴트가 그 어떤 경우에도 보여주는 나에 대한 믿음이다. 내가 충분히 능력이 있고, 성실한 품성을 지녔고, 전력을 다해 스스로를 발전시키려 한다는 그런 믿음은 아주 가끔 내 자존감이 쪼그라들 때 조차도 티없이 단단해서, 계속나갈 힘을 준다.
- 싱글에세 삶의 질을 결정하는 조건은 의식주 다음으로 동네 친구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쉽지만 회사 사람들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지는 않은 퇴근길에 부담없이 밥 먹을까 청할 수 있는 친구, 맨얼굴에 추리닝 바람으로 뒹굴거리다가도 겉옷만 걸치고 나가 한잔하고 쿨하게 헤어질수 있는 친구, 한 마디도 하지 않아서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린 것 같은 주말에 동네 극장에서 같이 영화를 보고 감상을 떠들 수 있는 친구, 따릉이 정류소에서 만나 자전거를 타고 슬슬 공원 한 바퀴 돌고 올 수 있는 친구. 도보 15분의 생활 반경 안에 이런 존재가 있을 때 삶은 훨씬 상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친구는 원한다고 해서 생기기도 않으며, 소개팅으로 만날 수도 없다. 근거리에 있는 만남 상대를 추천해주는 데이팅 앱도 친구를 알아보는데 쓸 용도는 아니다. 우연히 서로의 거주지가 가깝다 해도 각자 주량이 어떤지, 얼마나 외로움을 쉽게 견디며 어떨 때 타인을 필요로 하는지, 친구보다 애인을 우선하지는 않는지, 야근은 얼마나 잦은지 등 다양한 변수가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이런 동네 친구는 상상속의 동물 유니콘 같은 존재라고 전해져온다. 그런데, 우리집에 유니콘이 산다.
- 하와이 딜리버리.
- (피구에 대한 정의) 게임 내내 공에 맞을까 전전긍긍하며 피해 다니다가 결국 맞으면 선 밖으로 나가야 하는 맥없는 룰을 가진 데다, 흰 배구공에 대한 막연한 공포나 심어주며 사회에 나와서 써먹을 일도 없는 이런 게임.
- 느그 늙으면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나? 체력이다.
- 사위는 대접받지만 며느리는 오히려 대접을해야 할 거 같은 느낌이다. 딸내미랑 같이 사는 친구는 각자의 부모님께 의무는 없이 호의만 받는 자리다. 내가 어머님이 보내주신 열무김치를 맛있게 먹었다 해서 효도여행을 기획하거나 집안의 가전제품을 바꿔드려야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 당연하게 효도는 셀프니까.
- 호의. 이게 원래의 마음 아닐까. 관습과 가족 관계와 책임과 의무로 짓눌려버리기 이전의, 좋아하는 친구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갖는 친근한 마음. 내 자신과 함께 사는 친구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마음. 이 나라 모든 며느리, 사위, 장인 장모, 시부모 들에게도 원래의 마음은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왜곡없이 이 원래의 마음만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열무김치와 고기를 넙죽넙죽 받아 먹는 우리가 역시 위너인 것 같다.
- 살면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긴장, 걱정을 해소시켜주는 건 대단한 뭔가가 아니라 사소한 장난, 시시콜콜한 농담, 시답지 않은 이야기 들이다. 누구나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만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 쓸모없고 시시한 말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한 사람쯤은 갖고 싶은 것이다.
- 나는 평행우주에서 혼자 살아가는 나를 상상해본다. 그곳에는 깔끔한 동거인이 없고, 조금 쓸쓸하게 혼자 고구마를 구워 먹는 파괴지왕이 있으며, 고구마를 구워 먹다 흘린 자국이 눌어붙은 채로 점점 더꼐가 쌓여가다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난로가 있을 것이다. 아, 그 평행우주의 겨울 풍경은 너저분하고 스산하다.
- 누군가와 같이 살게 되면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타인이 강력한 주의 환기 요인이라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골똘해지거나 불안에 잠식당할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과일 깎아 먹으며 나누는 몇 마디 얘기로도 어떤 울적함이나 불안은 나도 모르게 털어버릴 수 있고, 함께 살면 그 현상이 수시로 일어나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힐 겨를이 없어지기도 한다. 집 안 어디엔가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 같은 것도 있다. (…) 집안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사는 건 잔소리쟁이가 사는 것보다 천배는 동기 부여가 된다. 그렇게 동거인 눈치가 보여 꾸역꾸역 뭔가를 하더라도 결과는 모두 내것으로 쌓인다. 더 낳아진 체력, 더 많은 성과가 나에게 더 큰 뿌듯함과 동력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종종 나에게 본보기가 되는 동거인의 존재 자체가 고맙다.
- 우리도 좋을 때는 정말 좋다. 별것 아닌 농담에 웃고, 서로의 취향을 넓히는 음악을 번갈아 틀어놓은 채 바보같은 춤도 같이 추고, 기운 빠지는 하루의 끝에 나를 다독여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확인해주는 누군가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사람의 인생에 그런 행운이 여러번 찾아오기도 할까? 아니 누구를 만나더라도 다시 이렇게 서로에게 맞추고 싸우고 짐을 합치고 버리고 못 버려서 싸우고.. 조율하며 살아나갈 일을 생각해보면 역시 엄두가 안난다.
- 1인 가구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모습은 법이나 제도, 관념보다 빠르게 변한다. 직장 한 군데를 정년까지 다니며 하나의 지업을 평생 고수하던 고용과 노동의 패러다임이 허물어진 것처럼, 아마 혼인이나 혈연으로 연결된 전통적인 가족의 형식에 들어맞지 않는 가구의 모습들이 늘어날 거다. (…) 평생을 약속하며 결혼이라는 단단한 구속으로 서로를 묶는 결정을 내리는 건 물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생애 주기에서 어떤 시절에 서로를 보살피며 의지가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따뜻한 일 아닌가. 개인이 서로에게 기꺼이 그런 복지가 되려한다면, 법과 제도가 거들어주어야 마땅하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다채로운 가족들이 더 튼튼하고 건강해질 때, 그 집합체인 사회에도 행복의 총합이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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