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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도 두려움도 없이 (곽정은, 2016)
21 Jun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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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 편견도 두려움도 없이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 저자 : 곽정은
  • 출판사 : 달
  • 날짜 : 21/06/2019

나는 어떤 단어로 나를 정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어떤 이름표가 달리는 순간 나의 정체성이 그 단어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특히나 무슨 무슨 주의자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대단한 사명을 가지고 옹호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는 타인의 삶에 관심 없을뿐더러,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아니라면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며, 인생은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 믿는 지극한 개인주의 자이다. 다만 나의 권리와 존엄을 침해하는 일에 저항하고, 사회의 억압이나 부조리에는 분노하며, 답답함이나 분노가 커지면 저절로 큰 목소리가 나오는 감정적인 인간이기도 하다. 만약 누군가가 목소리 높여 여성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을 페미니스트라고 한다면, 난 한국에 와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서른으로 막 넘어가던 시기,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결혼은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들은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고 했지만, 내 눈엔 결혼이란 것은,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안전할지는 몰라도, 안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서라면 결혼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나라를 벗어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 대신 이민을 선택했고 호주로 왔다.

30대의 대부분을 호주에서 지내며 30대의 한국 여성들, 나 같은 비혼 여성들을 포함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기혼 여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일이 없었다. 가끔 한국에 와서 만난 친구들은 조금 지쳐 보이긴 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나로선 그들의 삶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저 다들 나처럼 행복할 줄 알았다. 인간이란 각자가 원하는 선택을 하는 존재고, 그렇게 선택한 삶은 당연히 행복한 것이라는데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각자 원하는 선택을 하고, 각자의 인생을 사는 것.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삶이었다. (내가 그랬기에 남들도 그럴 거라 생각한, 말하자면 미천한 경험에서 온 무지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한국에서 살지도 않았고, 한국의 결혼 문화 안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었을뿐더러, 호주는 물론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당하는 차별이나 억압에 분노했던 적은, 적어도 내 기억엔 없었다. 기본적으로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나는 여성이기에 앞서 인간이었기에, 여성으로써 분노해야 했을 일에 무감각했을 수도 있고,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즘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의견이 없었다. 무관심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정치가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지지하는 정당도 없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던 것과 같다.

한국에 와서였다. 내 일이 아닌데 열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 건. 내 문제라기보단, 답답해서였다. 한국에 와서 가까이에서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한국에서 결혼 이후의 여자의 삶이란, 그저 착한 며느리, 순종하는 아내,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전부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내 친구들만 봐도 그랬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느라 자신을 돌볼 새조차 없는 그들을 보며 나는 처음엔 화가 났고 그 다음은 슬펐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그 답답함이 나를 목소리 높이게 한 것이다. 어쩌면 이건 특정한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과 비난 아닌가. 여자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받을 비난이 두려운 것이다. 여자라서 받는 비난이 한국엔 너무나 많았다.

선택적 관계를 누리다 보니 내가 직접적으로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체감할 일은 없지만, 한국 사회 전반에 사회적인 편견과 부조리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책을 읽으며 정확히 알게 되었다. TV 프로그램 속에, 걸그룹의 가사 속에, 성교육에, 결혼식에, 가정과 회사와 학교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퍼져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그리고 그 편견은 그 어디보다 우리의 사고 깊숙한 곳에 새겨져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한국에서의 삶은 대체적으로 힘들다. 남자도 힘들고 여자도 힘들다. 힘들어서 목소리를 낼 힘도 없는 게 한국 사회다. 내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내가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남자 여자 편을 갈라 싸우는 게 페미니즘이 아니다. 나는 모든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믿는다. 인종, 성별, 나이를 떠나 평등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권리이며, 자유로운 것이 인간으로서의 행복이다. 평등해야 마땅한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약한 쪽에 힘을 보탤 뿐이다. 그게 여성과 남성의 성문제이면 여성 편에 설 것이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문제라면 노동자의 편에 설 것이다. 만약 남성들이 차별받는 사회라면, 나는 남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남성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대한민국 여성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나는 한국 여성 전체를 대변할 수도 없는 소심한 사람이며, 나의 페미니즘은 대단하지도 않다. 단지 내 주변의 몇몇 여자들만 알아도 좋겠다. 적어도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육아와 가사는 효율을 떠나 부부가 함께 해야 하는 일이며, 엄마로서의 모성이 강요되기에 앞서 개인의 행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누가 이 책을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여자들이 주로 읽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 힘을 더하고, 뜻을 같이 하는 누군가와 연대하고 싶은 여성들이 이 책의 주요 독자들일 것이다. 여성의 권리와 평등에 관심 없는 남자들이 이 책을 읽을까. 그런 바람은 요원하다. 거기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무엇이 기울어져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 자신의 권리에 대해 모르는 여성들, 아니 적어도 내 주변의 여성들이라도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사회적 통념이란 개인들의 작은 관념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개인이 바뀌지 않는데 사회가 바뀔 리 없다. 제도적인 개선 또한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가장 먼저 여성들 스스로가, 여자라는 감옥에 얼마나 자신을 오래 가두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그것을 깨고 나올 수 있고, 나의 목소리로 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누군가가 대신 저항해줄 수도 없다. 내 삶의 문제는 내가 깨닫고 내가 바꿔야 한다. 아, 할 말이 많지만 자꾸 흥분하게 되니 여기까지만 쓴다.


Tags: 문학, 페미니즘,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