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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알고 싶어 할까 (채운, 2015)
12 Jul 2019
19 minutes read

  • 제목 : 사람은 왜 알고 싶어 할까
  • 저자 : 채운
  • 출판사 : 낮은산
  • 날짜 : 12/07/2019

나는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다. 알아야 머리와 마음이 움직인다. 알아야 이해가 가고 알아야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지 못할 땐 답답하고 그 답답함을 잘 견디지 못한다. 알지 못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왜 알고 싶어 할까?의 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 ‘알고 싶어서’ 제목만 보고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다. 그래서 아주 쉬운 말로 철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철학이란 완전한 앎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앎에 대한 이끌림, 앎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그렇다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 아닐까?

본성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상황이나 대상에 관심이 없거나, 무언가를 회피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세상의 이치는 고사하고 자기와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과는 뻔하다. 자신의 욕망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자기가 원하는 삶이 뭔지도 모르니, 죽어라 열심히는 사는데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와 있다. 여긴 아닌 것 같은데 돌아갈 자신도 없다. 피하고 도망치며 살다 보니 제대로 관계 맺지 못하고 스스로 지은 감옥에서 홀로 외롭다. 삶의 능력은 갈수록 약해져 작은 갈등도 견디지 못하고 작은 문제에도 허둥대며 실수와 실패로 자책하고 스스로를 비난한다. 이런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난 알아야겠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앎 자체가 전투라고 한다. 앎이란 기본적으로 질문을 동반한다. 앎이란 결국 자기 안에서 자기를 갱신해 가는 과정이며,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깨고 다양한 관점을 가져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으른 자들은 실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게을러지고 싶으세요? 원하신다면. 하지만 그러다 언젠가 몸이 굳고 생각이 굳어,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돌덩어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부디 기억하기 길’이라고 친절하게 말한다.

난 게으르게 사는 것도 본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결과가 어떨지 미리 ‘알면’ 제대로 선택할 수 있다. 모르고 하는 선택은 위험하고 무책임하다. 몰라서 그랬다는 핑계는 한 번으로 족하다. 모르는 게 죄냐고?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죄다. 인간의 본성을 등한시 한 죄. 그 대가는 평생 불행한 삶이다.

난 곤처럼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어 보았던가. 곤처럼 다른 존재가 되려는 시도를 해 보았던가. 붕처럼 쉬 없이 날아오르려 노력했던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부단히 다른 존재가 되려는 시도에는 반드시 배움이 뒤따르며, 그 결과는 자유다. 배움을 통해 삶의 지경을 넓히는 과정에서 나의 편견이 깨지고, 스스로 쌓은 성이 허물어진다.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고 다른 관계를 경험하게 되고, 또 그 안에서 그 과정을 반복하며 점점 더 확장하게 된다. 그래서 배우는 과정 그 자체가 곧 자유이다. 이 자유를 향한 여정의 시작은 앎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공자를 존경했지만 공자에게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 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지는 까닭을 물어 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_이탁호 <분서>

저자는 맺음말에서 니체식으로 말하면 무언가를 안다는 건 그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한다는 건 그것의 친숙함이 아니라 생소함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낯선 힘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라고, 무언가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자는 마침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알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법을 배우세요. 자신을,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낯선 것’을 사랑하는 법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똑똑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헛똑똑이’입니다.

알고 싶어 하는 순간, 그대들의 방황도 시작될 겁니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방황하는 게 인간이고, 방황 끝에서야 비로소 어렵사리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게 인생이니까요. 그러니 부디, 열렬히 욕망하시고, 죽도록 방황하시길!


  •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다르게 감각하고 다른 식으로 앎을 구성하며, 이걸 바탕으로 각자 다르게 감각하고 다른 식으로 앎을 구성하며, 이걸 바탕으로 각자 다르게 판단합니다. 게다가 존재하는 것들이 늘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요. 몸도 마음도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변합니다.
  • 누구도 예전의 자신이 아닙니다. 세상도 예전의 그 세상이 아니구요. 우리가 참 혹은 거짓이라고 알고 있는 것도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알려고하지요.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걸 알게 되니까.
  • 결국 무언가를 지각하거나 감각한다는 건 상황 의존적입니다. 즉 특정한 조건 속에서 무엇을 지각하거나 감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물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 조건이 사라지면 지각도 판단도 달라집니다.
  • 객관적 사실도 객관적 메세지도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모든 사실과 정보는 그걸 실어 나르를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실려 오는 루트에 따라, 그리고 수신 상황과 수신자의 상태에 따라 특정한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게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편견, 욕망 등에 따라 멋대로 인식합니다.
  • 하나의 정확한 지각, 하나의 올바른 감각, 오직 하나뿐인 진실은 없다는 것을요. 그런 다음 질문해 보세요. 나는 왜 새끼줄을 보고 놀란 것일까? 어제 나를 살게 한 물이 왜 오늘은 이토록 혐오스러워진 걸까? 왜 내가 본 사건과 저 사람이 본 사건이 다를까? 그러면 신기하게도 지금 자기가 있는 자리가 보일 겁니다. 무엇을 겁내고 무서워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것을 욕망하고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런 다음, 그 자리에서 조금만 비켜나 보세요. 아마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또다른 세계를 만나게 될 겁니다.
  • 안다는 건 사실의 문제라기보다는 진실의 문제입니다.
  •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넌 이제 지혜를 향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겠구나. 지혜에 대한 사랑, 이게 바로 ‘철학’의 어원인 ‘필로소피아’의 뜻입니다.
  • 철학이란 완전한 앎을 지칭하는게 아니라 앎에 대한 이끌림, 앎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어지고, 알고 싶어서 배우다 보면 또 새롭게 모르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결국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은 새롭게 ‘몰라 가는’ 과정이기도 한 셈이지요. (…)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이상한 기쁨, 이게 바로 ‘지혜를 향한 사랑’의 시작이지요.
  • 질병과 가난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돈이나 시스템 없이는 살 수 없으니 어떻게든 돈을 벌고 시스템 안에 들어가야겠다고 발버둥 치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 앎은 더 많은 것을 가지긱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고통 없는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남들과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닐까요?
  • 알고자 하는 욕망은 기본적으로 질문을 동반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시간, 공간)에 있는가, 나는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요.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못 견디게 알고 싶어집니다. 하여 세계를 탐색하기 시작하죠. 세계를 탐색하는 자들은 언제나 질문을 만나게 되고, 그 질문을 통해 앎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앎이란 질문이요, 질문이란 늘 그 안에 앎에 대한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 우리가 보고 들은 것들이 정말 진리일까? 자신이 본 것을 남도 똑같이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폭력이 있을까? 우리의 앎이란 어쩌면 각자의 감각을 중심으로 만들어 낸, 단편적이고 일그러진 파편에 불과하지 않을까?
  • 부단하다. 끊어짐이 없다는 뜻입니다. 끊어짐이 없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요? 물, 공기, 바람.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자연은 끊어짐이 없습니다. 끊어짐이 없다는 건 머물지 않고 늘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해는 끊임없이 뜨고, 물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그래서 썩는 법이 없습니다. 부단히 움직이며 날마다 새로워지지요.
  • 게으름은 무엇보다도 욕망과 연관됩니다. 우리는 게으름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한없이 게으른 사람도 뭔가에는 굉장히 부지런하거나 민첩합니다.
  • 아는 건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끝도 끊어짐도 없다는 얘기죠. 반대로 모르다를 몰라-간다라고는 하지 않는 건, 모른다는 것이 모르는 채로 머무르고자 하는 게으름의 상태이기 때문이죠. 앎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갖지 않을 떄,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존재할 때 성립합니다.
  • 앎 자체가 바로 전투의 과정이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게으름, 한번 결정된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관성적 게으름과의 싸움이지요. 앎은 이 게으름과의 전투 속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새겨지는 근육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아가는 과정이란 결국 자기 안에서 자기를 갱신해 가는 과정인 것이지요.
  • 게으른 자들은 실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귀찮아 죽겠는데,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을 애초에 뭣하러 하겠어요. 하지만 알고자 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실험합니다. 실험을 통해서만 자신의 ‘신념’을 깨고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앎을 구성하는 것, 그것은 바로 부단한 자기 실험입니다. 한 껏 게을러지고 싶으세요? 원하신다며. 하지만 그러다 언젠가 몸이 굳고 생각이 굳어,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돌덩어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부디 기억하시길.
  • 모든 앎에는 관계의 흔적이 새겨져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세계를 경험한 방식, 다른 존재들과 관계 맺는 방식, 세계를 욕망하는 방식이 나의 앎을 구성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앎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지능이 아니라 관계 맺는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 세계는 ‘머리’로 알아지는 게 아닙니다. 몸으로 부딪히면서 알아가는 것이지요. 환경과 다양한 사건 사고 등, 우리 몸은 각자 살면서 마주친 것들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 역시도 그런 마주침의 흔적들을 담고 있지요. 우리의 앎을 구성하는 것은 그런 마주침들인 셈입니다. 알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움직이세요. 사방의 문을 열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나오세요. 그 다음엔? 일단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분명 무슨 일인가가 생길겁니다. 무언가가 다가올테고, 다가와 나를 건드릴 테고, 위험에 빠트릴 테고, 낯선 세계로 인도할 겁니다. 그러니 우선은 자기만의 앎의 세계를 꺠고 나와 움직여야 합니다 .
  • 뭔가 뭔지 모르는 채 ‘잃어버리는’ 시간들의 의미를 알게 되는 건 언제나 ‘나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현재란 과거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나중’인 것이지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집착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고, 의미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ㅡㄹ셀은 현재 자신이 해야하는 건 나중에 깨닫게 된 그 진리들을 기록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릅니다. 우리가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한 시간 안에 실은 모든 진실이 들어 있었구나.
  • 세계를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객관적인 하나의 앎을 찾으려 할 게 아니라 더 많은 정서와 눈들을 통해 앎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관점주의)
  • 인생이란 길과 같은 거란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걸어가야 해. 만일 우리가 그만두면 그것은 길 위에서 걷는 것을 그만두는 것과 같단다. 밤이 지나면 우리는 일어나 다시 그 길을 걸어야 하지. 그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앞에 나타나는 조그만 종잇조각들과 같은 경험들을 발견하게 될 거야. 누구나 충분한 종잇조각들을 가질 수 있단다.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을 읽은 다음 그것을 가슴에 가져가는 거야. 그러고는 그 종잇조각들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길을 계속 가는 거란다. 왜냐하면 더 집어야 할 종잇조각들이 아직 많이 있기 때문이지. 나중에 그것들을 꺼내서 찬찬히 들여다보면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단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이렇게 종잇조각들을 모은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보다 많은 것을 읽게 되겠지. 우리가 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단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로워지는 거란다.
  •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종잇조각들을 줍게 됩니다. 그것은 경험이 알려주는 지헤죠. 하지만 종잇조각의 의미를 바로 알 수 는 없습니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계속 줍고 종잇조각에 적힌 것들을 읽고, 읽은 내용을 가슴에 담고,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길을 갈 뿐이지요. 데이비스는 말합니다. 더 많은 종잇조각을 모을수록,더 많이 읽을수록 지혜로워질 수 있다구요. 그는 결코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모아서 남들보다 많이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찬찬히 들여다보고 가슴에 새기고 더 많이 생각하라고 할 뿐입니다.
  • 돈을 적게 벌어 적게 쓰고 살면 취업에 목숨 걸지 않아도 되지 않겠냐고, 올바르게 사는 것보다 멋지게 사는 게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앎과는 다른 앎을 구성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겁니다. 동시에 그가 사는 세계도 분명 다른 식으로 만들어지는 중일테지요.
  • 이 세계는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앎 또한 그렇습니다. 살아가면서 알게 되고, 알아가면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신체와 마음, 의식과 무의식, 나와 타자들, 이 모든 세계가 우리의 앎을 구성하고, 거꾸로 우리는 앎을 통해 세계를 구성합니다. 앎과 세계는 이렇게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들 하지요? 물론 무식해서 용감할 수는 있습니다만, 이건 자칫 성과 없이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공자 역시 용기를 강조해지만, 그건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었습니다. 무사의 특권이던 용기를 지식인의 덕목으로 가져와 ‘아는 자의 실천’을 강조했던것이죠.
  • 세상에는 많은 상식과 통념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든가, 법과 도덕은 지켜야 한다던가, 가족은 사회의 기원이라든가, 인간은 누구나 부유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어 한다든가, 세상은 끊임없이 진비하고 발전하며 우리는 예정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든가, 혹은 선악, 미추, 빈부, 개인과 사회 등등에 대한 셀 수 없이 많은 상식과 통념들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하지만 통념이나 상식은 한 사회 속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가치일 뿐이지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상식이나 통념에 반한다고 해서 그것을 ‘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 안다는 것은 아무런 의심 없이 상식과 통념과 습관에 젖어 있던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항한다. 고로 안다.
  • 소통이란 너와 내가 ‘중간’에서 만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상대의 눈이, 상대의 마음이 되어 보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앎을 구성해 보는 것이죠.
  • 우리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그 불행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어 합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런다고 불행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일단 그런 식으로 원망하고 소리치고 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우리에겐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어떤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서 특정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세계를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힘, 나아가 그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는 힘 그게 지혜입니다.
  • (디오게네스) 나는 내게 무언가를 준 사람을 향해서는 꼬리를 흔들고, 거부하는 이에게는 짖으며,나쁜 사람은 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개처럼 거침없이 살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얘깁니다. 그는 어떤 행위를 하든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타인의 눈치를 보는 법도 없었고, 세속의 부나 명성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그런 걸 좆는 사람들의 야심과 자긍심을 조롱했죠. 그러면서 자신은 개처럼, 즉 집, 가족, 부와 같은 사회생활의 필수족 조건들이라든가 예의와 체면에 무관심하게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조건과 사회적 규약들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을 구속하고, 소유와 집착을 낳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생각한 대로 살았습니다.
  • 그리스인들은 누가 더 옳은지, 어떤 지식이 더 현실에 이익이 되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자신이 말한대로 사는지, 그의 앎이 팔다리처럼 일상에서 실천되고 있는지, 그의 앎이 그의 삶을 얼마나 고귀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만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에게 철학이란 삶을 나만의 스타일로 멋지게 만드는 일상의 활동이었고, 정신의 불균형에 대한 지속적 치료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 (소로) 노동의 시간을 제외하면 산택과 사색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문명을 다 누리면서 문명을 비판하는 대신, 문명에 예속된 삶을 거부하는 실천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즌 겁니다. 더 많이 알기 때문에 무언가를 실천한 게 아니라, 무언가를 시도함으로써 앎의 지평을 넓혀 간 것입니다.
  • 앎과 실천은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앎은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부딪히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형상을 갖추게 되고, 실천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앎을 동반하면서 더 풍부해집니다. 소로와 간디에게는 앎이 실천이고, 자유고, 구원이었던 셈입니다.
  • 앎을 실험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자신이 진리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실험도 할 수가 없다. 할 필요도 없고. 아직 진리가 뭔지는 모르지만, 기존의 삶에서 어떤 문제를 발견한 자들, 앎과 삶 사이에 놓인 어떤 거리를 인식한 자들, 자신의 앎이 아직 한참 무력하거나 덧없다고 느끼는 자들만이 실험에 착수할 준비가 된 것이다.
  • 모두가 그렇게 산다 해도, 그게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두려운가? 하지만 남들처럼 산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라. 많은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 열심히 공부하지만 그럴수록 더 큰 두려움이 갇히고 말지 않는가.
  • 간디도, 소로도, 디오게네스도, 책상머리에서 세상을 논하지 않았다. 우선 자신의 마음속으로 깊이 침참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이 네가 원하는 삶인가? 너는 스스로 진실한가? 자유로운가? 행복한가? 그런 다음 세상속으로 뛰어들었다.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남긴 말 한마디, 글 한구절이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고, 그들의 행위가 한없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질문하고 실험하는 삶. 노동을 통해 단련된 근육처럼 튼튼하게 단련된 앎.
  • 그래 꼭 남을 위해서야 아니야. 나의 삶을 그렇게 살면 된다. 소로가
  • 첫번째가 배움 자체에 대한 즐거움, 두번째는 배운이 파생하는 관계의 즐거움, 세 번째는 배움으로 얻게 되는 마음의 자유. (호학자)
  • 배움에는 두려움이나 불안이 따르지 않습니다. 배움이 깊을수록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확대되기 때문에 점점 자유로워짐을 느끼게 됩니다. 순간의 짜릿한 쾌락은 없지만, 천천히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한 해방감을 맛보게 됩니다. 많고 깊어질수록 가벼워지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을 통한 앎입니다.
  • 자유란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상태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고 여기는 자세로 자유를 생각하면 자유란 항상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자유는 수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요 조건적으로 무엇이 충족되어야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 장자 소요유
  • 진정으로 자유롭고자 한다면,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난 곤처럼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어 보았던가. 곤처럼 다른 존재가 되려는 시도를 해 보았던가. 붕처럼 쉬 없이 날아오르려 노력했던가.
  • 소요유는 모든 조건이 갖춰진 사람이 시간이 남아 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조건을 박차고 나와 끊임없이 다른 것들로 변화하려는 사람들, 자신이 사는 세계와 자신의 사고를 절대화하지않고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 기존의 가치에 대해 질문하고 다른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놀 수 있습니다. 자유로울 수 있는 겁니다.
  • 이 모든 시도에는 반드시 어떤 배움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질문도 그냥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묻고 앎의 욕망을 발산하는 사람에게만 의문이 떠오르고 차이가 포착되는 법이니까요. 자유란 이런 기웃거림, 이런 질문하기, 이런 시도들 외에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 안회는 가난했지만 그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죠.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아프거나 건강하거나, 시간이 없거나 많거나,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 번개와 천둥이 칠 때 무서운 신이 우리를 벌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공포에 떠는 건, 번개와 천둥이 치는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병이나 죽음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아픔과 죽음이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보편적 사건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앎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지식뿐 아니라, 태어나고 아프고 늙고 죽는 ‘인간 전체’애 대한 통찰과 우주의 보편적 법칙에 대한 깨달음을 모두 포괄합니다.
  • 배움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건, 배우는 과정 자체에서 나의 편견이 깨져 가고,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고, 다른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됨을 뜻합니다. 배움의 결과가 아니라 배우는 과정 자체가 바로 자유인 것이지요.
  • 내가 누군인지, 내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곤처럼 우선 자기가 있는 곳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나오기가 두려워서 그렇지, 일단 나오면 세상엔 예기치 못한 삶들이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있답니다. 나와서 다르게 숨 쉬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아마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 생기게 될 겁니다. 그러면 비로소 자신의 마음과 욕망도 보이기 시작할 거구요. 시도하는 만큼, 배운 만큼 깨진 만큼, 알게 된 만큼, 그만큼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 배우는 자들은 압니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진다는 사실을요.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배움은 끝나 버린다는 사실을요.
  • 배움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건 다른게 아닙니다. 새로운 것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의 믿음과 욕심을 버리는 것이지요. 내가 아는 것이 진리라는 믿음, 앎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욕심, 그걸 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또 다른 앎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 (앎에 대한 통렬한 반성)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공자를 존경했지만 공자에게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 지르는 격이어싸.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 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지는 까닭을 물어 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_이탁오 분서 친구가 된다는 건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킨다는 걸 내포합니다. 단순히 의견을 교환하고 정보를 교류할 뿐이라면, 그냥 아는 사람이지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 누구도 홀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행복하고자 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신체적, 정신적 교감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지요. 때로는 그 과정에서 상처를 주고 또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용없습니다. 부도, 지식도, 명예도, 그 모든 걸 다 가지더라도, 혼자 있는 이에게는 슬픔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지요.
  • 알고 싶어 하는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알기 위해 배움의 길을 떠나는 자들만이 그여정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나이기도 하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이기도 한 친구. 그 마주침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을 벗어나 말 할 수 없는 기쁨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길 위헤서 모든 존재와 친구하며 미지의 앎들을 내려받고 올리는 여행자, 그거야말로 진정한 굿 다운로더가 아닐까요
  • 맺음말 https://photos.app.goo.gl/UALKyQyvmhCoNBDR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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