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y Me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재민, 2018)
30 Jul 2019
5 minutes read

  • 제목 :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설쓰는 판사의 법정이야기)
  • 저자 : 정재민
  • 출판사 : 창비
  • 날짜 : 30/07/2019

이 책은 서가에서 아주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고른 책인데 몇 장을 읽다 보니 계속 읽게 되었다. 판사가 쓴 에세이다. 에세이는 언제나 술술 읽혀서 좋다. 사회과학 중에서도 법학으로 분류되는 책이지만 무거운 사회문제를 다루거나 부조리를 들춰내지 않는다. 따뜻한 마음의 판사 아저씨가 쓴 회고록에 가깝다.

4학년 때였나, <생활 법률>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살면서 알아야 할 그야말로 기본적인 법률 지식들에 대한 수업이었다. 그 수업의 과제로 법원 견학이 있었다. 갔다 와서 뭘 써내라고 했는지 그냥 가보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법원에서 내가 느꼈던 기분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20년 남짓 살면서 알지 못했던, 몰라도 괜찮았던, 유쾌하지 않은 세상의 다른 면을 본 기분이었다. 법정의 엄숙한 분위기에 위축이 되기도 했고, 방청석에 앉아 사건들을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성추행 한 젊은 남자,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린 아저씨, 무전 취식한 노인네, 사기죄로 잡혀온 아줌마. 참으로 가지각색이었다. ‘범죄자’에 대한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달리 모두 너무나 멀쩡해 보이던 사람들이라 놀라기도 했다. 큰 사고를 치거나 골치 아픈 사건에 연루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법정을 나오면서 가끔 사는 게 지루할 때 법원에 한 번씩 들러봐야겠다 생각했지만 그 이후로 법원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20년이 지난 이젠 어떤 마음이 올라올까, 법원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판사.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를 판결하는 사람이니 그야말로 엄청난 권력이다. 가장 공정해야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사람이고,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나 주관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법이란 게 때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결국 법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다. 법정에 갈 일을 안 만들면 제일 좋겠지만 사는 게 어디 그런가.

도덕이란 참으로 애매하다. 기준이 애매하다.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행동 범위를 도덕이라고 할 때, 그 상식은 과연 누가 만든 건가? 사회적 도덕의 잣대로 개인의 욕구를 재단하는 일은 도덕적인가? 저자의 말대로 몸과 정신이 연약하고 늘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도덕적 일관성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비도적인일 아닐까. 저자는 말한다. 판사는 적법성을 판단할 뿐 도덕성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나는 판사가 위법과 적법을 판단하는 사람이지 도덕성을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도덕적 판단은 각자의 마음속 판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 나 스스로 나의 모든 행위의 준칙을 자신 있게 설정하고, 나 스스로 나의 행위의 가치와 당부를 판단하는 마음속의 판사가 되기를 꿈꾼다.

40년이 넘게 살면서 법원은 고사하고 경찰서 한 번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없이 평탄하게 살았단 얘기다. 그렇다고 죄를 안 짓고 산 건 또 아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으니까.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피해 당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할 뿐이다. 내가 가진 도덕이라는 가치에 문제가 없는지를 늘 점검하면서,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각자 알아서 잘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뭐 그 단순한 게 안돼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법이란 게 있는 거겠지만.




  • 만남의 핵심은 시선을 맞추고 목소리를 섞는 데 있다. 나는 사람의 영혼은 눈빛과 목소리와 체온을 통해서 육체 밖으로 삐져나온다고 믿는다. 그러니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서로 눈빛과 목소리의 진동과 체온을 나누는 것이다. 누군가와 친밀해진다는 것도 결국 상대의 눈빛과 목소리와 체온에 익숙해지고 이를 거북해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 괘씸죄를 두려워해서 자백하는 피고인들이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법정 밖의 사회에서도 갑을관계 속에서 숱아헥 적용되는 괘씸죄에 시달렸을 것 같아서다. 무수한 ‘갑을’관계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사회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갑’일 때는 판검사가 되지만 ‘을’일 때는 피고인이 된다. 을은 갑으로부터 억울한 면박과 수모를 받아도, 심지어 겁박이나 인신모욕을 당해도, 갑에게 솔직하게 억울하다 말할 수 없다.
  • 나는 판사가 위법과 적법을 판단하는 사람이지 도덕성을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도덕적 판단은 각자의 마음속 판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의 도덕성을 판단할 수 있을까. 애초에 도덕이란 것이 타인이 만들어낸 것인데. )
  • 몸과 정신이 연약하고 늘 변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도덕적 일관성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비도덕적인 것 아닌가 투덜거리면서. (…) 나 스스로 나의 모든 행위의 준칙을 자신있게 설정하고, 나 스스로 나의 행위이 가치와 당부를 판단하는 마음속의 판사가 되기를 꿈꾼다.
  • (결과채무) 국민 눈에는 재판관이란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결과 채무’다. 의사가 아무리 친절하고, 인품이 좋고, 설명도 잘해주고, 성실하게 치료해도 오진을 내린다면 누가 좋은 의사라 하겠는가. 그저 돌팔이일뿐이다. 차라리 불친절하고 성의 없어 보여도 정확히 진단해서 확실히 치료해준 의사가 진짜 의사다. 아무리 인품이 좋고 친절하고 연륜이 높아도 판결이 엉터리라면, 인품이 나쁘고, 불친절해도 정확한 판결을 하는 판사보다 못하다. 아니, 훨씬 나쁘다. (맞어, 맛없고 친절한 식당엔 다시 가지 않는 것처럼, 김밥 집 아줌마가 친절하지 않아도 김밥이 맛있으니 나는 간다. 이것이 본질과 현상의 차이인데, 우리는 아주 자주 본질을 잃고 산다. )
  • 사람들이 말하는 ‘좋다’ ‘나쁘다’의 기준은, 겉으로는 도덕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이익’이다. 자신에게 이익이나 기쁨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자신에게 손해나 불쾌감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나쁜 놈’이다. 도덕주의적인 척하지만 사실은 이해타산적이다.

Tags: 사회, 법학,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