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누군가의 열등감에 대한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열등감. 실은 그게 뭔지 잘 몰랐다. 열등감이란 단어는 써본 적도 없는 단어였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랐다. 왜 열등감을 느끼지? 부러운 거랑 다른 건가? 부러움과 열등감의 차이가 뭘까? 등의 질문이 올라왔을 뿐이다.
‘부러움 = 열등감’이라면 나도 열등감을 자주 느낀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분명히 부러움이 열등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렇구나’라고 하고 넘어가기엔 뭔가 찜찜했다. 왜 열등감을 느낄까..?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어렴풋이 답을 찾았다. 미안함과 죄책감, 부러움과 열등감 사이에는 넓은 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강이 무엇인지, 왜 열등감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한 내용을 옮겨 본다. 도식으로 표현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비교 (사실 Fact의 발견)
굳이 시작을 찾아보자면 그 시작은 비교다. 나와 어떤 대상을 비교하는 데서 시작한다. 너는 가졌는데 나는 가지지 못한 것, 너는 하는데 나는 못하는 것, 너와 나의 다른 점을 발견하는 ‘비교’라는 행위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사실의 발견일 뿐이다.
흔히 행복하기 위해서는 남들과 비교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모두 다르고, 너와 내가 다른 점이 있고, 그 다른 점을 찾아내고 구분하는 것은 인지를 가진 인간이라면 모르거나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라는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한다면 ‘비교하지 말라’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문제를 읽지 말고 답을 맞히라는 말이요, 물에 들어가지 말고 수영하던가 수영을 하되 옷은 적시지 말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큰 사과가 있고 작은 사과가 있다.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이 있다. 그 둘의 다름을 발견하는 것은 그냥 사실의 발견일 뿐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뿐이다. 비교하는 것 문제없다.
부러움 (감정)
비교, 너와 나의 다름(=fact)를 발견했을 때 부러움이라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누군가가 가졌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누군가가 하고 있다면 당연히 부러운 거 아닌가? 아무런 욕망이 없지 않고서야,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부러움, 동경,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은 발전할 수 없다. 부러움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느껴야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의식의 흐름이다. 따라서 감정도 문제가 없다.
문제는 자기 인식이다.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어떤 자기 인식이 바탕이 되느냐 따라 생각과 감정은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생각은 또 다른 감정을 낳고 감정은 또 다른 감정을 불러온다.
자기 성찰이 부족한 경우,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남의 건 좋아 보이니 저게 내가 원하는 건가? 싶어 헷갈리고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린다. 잘못된 선택을 하기 딱 좋다.
반대로 자기 성찰이 충분하여 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명확한 경우, 또는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아는 경우는 쉽다. 멋진 차를 가진 사람이 부러울 수 있다. 멋진 차가 있으면 좋겠지만 유지비와 관리비 등 그에 따라오는 책임을 감당할 생각이 없고, 그저 가끔 멋진 차를 타고 싶은 거라면 그건 그 정도 원하는 거다. 멋진 차를 못 사는 게 아니라 안 사는 거다. 내 선택이다. 너는 너의 선택을 했고 나는 나의 선택을 했고 각자 선택한 길로 가는 거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잘 가면 된다. 즐겁게 잘 가라고 인사해주는 걸로 끝이다.
만약 어떤 책임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확신이 있다면, 그건 정말 원하는 거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이것이 정말 나에게 중요한 것이면? 하면 된다. 보험료, 세금, 유지비, 수리비 다 감당할 수 있을만큼 차가 가지고 싶으면? 사면 된다. 뭐가 문젠가? 돈이 없어서? 할부로 사서 갚던가 열심히 모아서 사면 된다. 돈이 없어서 못사는 게 그렇게까지 하면서 사고 싶지는 않은거다.
자기 부정에 가득 찬 사람은 자기의 선택과 책임을 모른채 이래서 못해 저래서 못해라고 핑계를 대며 모든 이유를 밖에서 찾는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 나에 대한 긍정이 부족하면 상대방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다.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방법을 모르거나 제대로 안 해서 못하는 것을 내가 무능해서, 모자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고 자기 비하에 빠져 스스로를 괴롭힌다. 그게 열등감이다.
나를 모르고,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남 탓만 하게 되고, 결국 자기를 미워하게 된다. 원하는 삶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악순환이다.
자기 사랑
자기 사랑이 없으면 감정도 엉뚱한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정확히 아는 것, 그 선택의 결과가 뭔지 아는 것, 나와 내 능력을 긍정하는 것,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제대로 배우고 실천하는 것. 그게 자기 사랑이고, 성장이자, 원하는 삶을 사는 방법이다.
살고 싶은 삶이 있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원하는 것에 대한 확신, 나에 대한 긍정, 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배우고 실천하면 된다. 자기 성찰을 확신을 반복 점검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해나가면 된다. 원하는 삶을 살면 된다.
결론 (열등감을 벗어나는 법)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비교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열등감은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에서 온다. 올라오는 감정마다 휘둘리고, 불안해하며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려면 나의 중심에 내가 있어야 한다.
죄책감도 마찬가지다. ‘미안함’이라는 감정에 자기 인식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반성과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도 있다. 미안할 짓을 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 답이 아니다. 무엇을 실수했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 내 실수는 내가 책임진다는 자기 책임, 나아질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만 죄책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열등감과 죄책감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던 것은 결코 내가 열등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내가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나도 때로는 누군가가 부럽고,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사람이니 느끼는 감정이다. 다만 어떤 언어로 나를 표현하느냐, 그 감정에 어떤 라벨을 붙이냐는 매우 중요하다.
돌아보면 내가 부러움과 미안함을 못 느껴서가 아니라 내 감정에 그런 단어를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느끼는 미안한 감정을 ‘죄책감’이라고 하지 않았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느끼는 부러운 감정을 ‘열등감’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언어를 쓰는 건지, 그런 언어를 써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는 거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던, 그런 언어를 의도적으로 쓰지 않던,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해보는 거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과 같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채 타인의 사랑에 의지하는 것은, 인공 호흡기 끝에 달린 삶이요, 남에게 내 목숨을 맡기는 것과 같다. 나를 사랑하는 것도 나고, 나를 지키는 것도 나다. 부모도 자식도 애인도,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