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기에 가능한 일들이 있다. 알고나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이번 여행이 그랬다.
돌아보니 그저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아무 훈련도 하지 않았고 별다른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임도 라이딩을 간다길래 눈누난나 따라 나섰다. 내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아닌지도 몰라서, 한 2-3일 달려보고 정 안됨 중간에 탈출해야지 했는데 결국 7일이나 달려버렸다. 3일을 달렸는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4일째도 달리기로 했고, 4일을 달리고 나니 6일 못달리겠냐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알고보니 7일이었음) 일단 산으로 들어가면 나오는데 한참 걸린다는 점도 함정이었지만, 통신도 안 되고 인적도 드문 첩첩 산중이라 혼자 움직이기가 조심스러웠던 것도 있다. 어쨌든 계획보다 훨씬 길어진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살아 돌아왔다.
여러가지로 운이 좋았다. 함께 달린 세 분 모두 수준급의 리더님들이라 쪼렙인 나는 뒤에서 쫓아가기 바빴지만 마음만은 든든했다.
첫째날 오전을 빼고는 날씨도 내내 좋았다. 해가 쨍해서 좀 덥긴 했지만 비가 오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밤에는 반딧불이를 보기도 하고 은하수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별자리를 찾기도 했다.
작은 사고도 있었다. 셋째날인가 내리막에서 움푹 파인 마사토에 미끄러져 무릎에 찰과상을 입었고 같은날 계곡에서 놀고 걸어 나오면서 미끄러져서 물에 풍덩. 하지만 넘어지는 순간 손을 높이 치켜 들어 핸드폰을 지켜냈다.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핸드폰을 지켜낸 것이 더 기뻐서 아프지 않았다.
힘들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첫날은 첫날이라 힘들었다고 치고. 둘째날부턴 생리까지 겹쳐 여러가지로 힘들고 불편했다. 70km를 넘게 달린 날은 자전거가 지겹다는 생각까지 올라왔고 그 다음 날은 몸에 이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마지막날 버스 터미널에서 집에 오는 아스팔트 평지길에 두 번이나 쉬어야 했다. 25km는 보통때면 한 번에 휙 달릴 거리다. 몸은 정직하다. 깜냥을 오버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라이딩도 힘들었지만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썩어가는 발. 젖은 운동화를 신고 달리다보니 발이 팅팅 불고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몇일 지나니 오징어 냄새가 진동. 꼬랑내가 뭔지 확실히 알아버렸다. 운동화는 결국 서울와서 폐기했다.
상세 일정
첫째날
신남 - 조교리 - 물로리 - 품걸리 (40.6km +1,371m -1,384 m)
신남에서 출발, 품걸리까지 크고 작은 고개를 네 개 넘었다. 첫번째 고개에 오르자 안개가 몰려오고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신나게 내려오니 브레이크 잡느라 손아귀가 얼얼. 신발은 축축. 두번째 고개는 풀이 무성했고 잔디밭이 넒게 깔려 있어 멋졌다. 내려와서는 계곡물에서 잠시 땀도 닦았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좀 힘들지만 괜찮았다. 세번째 고개는 아주 뾰족하고 사악한 아스팔트 오르막이었다. 헉헉 페달을 밟는데 눈꺼풀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호흡이 딸려 몇 번을 멈춰 숨을 고르고 간신히 도착했다. 아니 다들 저 무거운 페니얼 달고 어찌 저리 잘들 달리실까. 네 번째 고개는 초반에 샘물이 있어서 물통도 채우고 세차도 하고 기분 좋게 출발했으나 그도 잠시. 길도 험하고 가팔라 타다 걷다를 반복했다. 모두들 오늘의 체력을 다 쓴듯. 원래는 가락재를 넘어가서 잘 계획이었으나 날도 저물고 더 이상은 무리라 판단, 품걸리 마을회관 근처에 민박을 잡았다. 하. 첫날이라 이렇게 힘든거겠지..?
둘째날
품걸리 - 야시대리 - 철정 교차로 - 화상대리 (52.5km + 1,296 m / -1,265 m)
큰 산을 하나 넘고 내려오면서 자잘한 고개를 몇 개 넘었는데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물 웅덩이가 몇개 있었고 젖은 풀나무들이 팔다리를 자주 할퀴었다. 운동화가 마를 새가 없어 하루종일 축축한 발로 달렸다. 오후 쯤엔 철정리를 지나며 에어컨 있는 식당에서 점심겸 저녁을 먹고 충전도 했다. 하루종일 열심히 페달을 밟았지만 계획한 만큼은 못 달렸다. 어딘가를 열심히 오르다 넓은 공터에서 자리를 잡았다. 마침 농막 옆에 물이 흐르고 있어 하룻밤 묵어가기 좋았다. 노을도 예뻤다. 어딘지 모르고 죽을똥살똥 페달질만 했지만 오늘은 그래도 좀 살만했다. 발에서 오징어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셋째날
화상대리 - 어론리 - 서석- 불발령 (63.1 km + 1,842 m / -1,104 m)
아침부터 어딘지도 모르는 숲 길을 오르락 내리락, 중간에 한 번 미끄러져 무릎에 찰과상을 입었지만 나름 재미났다. 서석에 내려와서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고 황금빛 들판을 달려 계곡물에서 시원하게 몸도 담글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 이후가 지옥길이란 것은 모르고.. 불발령을 오르는 길은 마사톤지 뭔지 움푹 파이고 미끄러지는 구간이 많아서 자전거를 타기도 힘들지만 끌기는 더 힘든 고난길이었다. 몇번 자빠질뻔 하고는 끌고 타고를 반복하며 가까스로 정상에 올랐다. 오는 길은 개고생길이었지만 정상에 오르니 멋진 뷰가 뙇! 특혜를 받아 정자 지붕 밑에 텐트를 쳤다. 물티슈로 대충 닦고 솔솔 부는 바람에 말려주니 기분 최고.맥주도 한 모금 마시고 밤배님이 궈주는 고기도 실컷 먹었다. 밤하늘엔 은하수가 총총. 아 이맛이지.
넷째날
불발령 - 운두령 - 속사 - 진부 (70.2 km+ 1,287 m / -1,313 m)
불발령 정상에서의 아침. 해가 떠오르자 운해가 멋지게 펼쳐졌다. 내 언제 이런 아침 숲길을 자전거로 달려보리. 7시에 불발령을 출발해 자운임도를 즐겁게 달리고 운두령도 가뿐하게 넘었다. 아스팔트는 이제 뭐 껌이쥐. ㅎ 정상에서 잠시 쉬었다가 속사를 향해 10km가 넘는 공도 내리막을 신나게 달렸다. 속사에서 잠시 휴식 후 다시 고개 하나를 호로록 넘어 진부로 넘어가 솔롱고스님이 비대면으로 쏘신 한우로 점심을 거하게 먹고 다시 숲길로 올라섰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어선지 힘은 남아있었지만 해가 저물고 있었기에 임도 중간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오늘은 공도가 많아서인지 70km나 달렸다. 물티슈 두 장으로 대충 몸을 닦고 주문을 외웠다. 나는 개운하다 나는 개운하다..
다섯째날
진부 - 숙암리 임도 - 숙암리 (69.2 km + 1,453 m / -1,797 m 마지막 3km 정도 짤림)
가장 힘든 날이었다. 임도를 70km 넘게 달렸다. 7시에 출발해 고개 하나를 넘고 1000m 언저리의 완만한 숲길을 달리다가 11시 쯤 계곡으로 내려왔다. 젖은 텐트를 말리고 간단히 점심도 해결하고 계곡물에 발도 담궜다. 여기까진 날씨도 좋고 모든것이 좋았으나..
숙암리 임도에 접어들자 날은 덥고 길은 험했다. 헉헉대며 자전거를 끌고 걷는데 ‘아 지겨워’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힘들다도 아니고 지겹다라니, 자전거가 지겹다는 생각은 자전거 인생 12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나마 흐르는 물에 몸을 적시고 나니 몽롱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 와중에 밤배님 타이어가 찢어졌다. 긴급 조치를 했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무조건 산을 내려가야 해서 20km 정도를 죽어라 페달질을 하는데 나중엔 발바닥이 다 아파왔다. 두 시간 정도를 어떻게 달렸는지 기억에 없다. 7시에 시작한 라이딩이 7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모두의 상태를 고려하여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제대로 샤워도 하고 빨래도 했다. 몇일째 덜덜대는 오르막 내리막을 달려선지 내장의 흔들림이 통증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섯째날
숙암리 - 청옥산 자락 (39.3 km + 1,284 m / -718 m)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는 쨍하니 좋은데 컨디션은 꽝. 다행히 오전을 여유롭게 휴식하고 느즈막히 출발했다. 혼자다닐 땐 노상 지도를 보면서 달리는데 이번 여행은 어딘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따라간다. 무념무상. 호흡과 페달질에만 집중한채 페달을 밟으면 경사가 왠만큼 심하지 않으면 굴러간다. 안 굴러가면 내려서 끈다. 초반에 임도로 올라가는 경사가 매우 심했지만 한 번 올라온 뒤 1000m 언저리에서 오르락 내리락 달리는 길은 꽤 재미있었다. 꿀렁꿀렁 능선을 달리다가 해가 저물때쯤 임도 적당한 곳에 텐트를 쳤다. 숲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별은 오늘도 총총.
일곱째날
청옥산 자락 - 평창 (26.4 km + 309 m / -950 m)
집에 가는 날이다. 신난다. ㅎㅎ 7시에 출발하자마자 내리막을 신나게 달렸다. 겹겹이 푸르른 산봉우리 사이사이 하얗게 깔린 구름이 내려다보였다. 자전거를 타고 여길 올라왔다니. 접산을 넘어 영월까지 가서 빠지려고 하였으나 늘보님의 상처에 긴급 처치가 필요해졌다. 안그래도 자전거가 요동칠때마다 끙 소리가 절로 나오던 차에 아싸 잘됐다! 메딕을 자원, 평창 병원까지 호송을 담당하기로 했다. 신나면 안되는데 신났다.ㅋㅋ 아쉬워하시는 밤배님과 우암님을 뒤로 한 채 크게 손을 흔들며 멧둔재터널 사거리에서 해산. 간다 간다 내려 간다 집에 간다 야호~! ㅎㅎㅎㅎ
총평
울트라 라이딩. 말 그대로 체력적 한계를 경험했다. 충분히 기특하고 뿌듯하지만 더 많은 준비를 하고 갔어야 했구나 싶다. 어쨌든 이제 당분간 휴식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