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중순. 8박 9일 일정으로 규슈 올레길을 걸었다. 9일 중 앞뒤로 하루씩은 이동에 썼고, 7일 중 하루는 비가 와서 쉬고, 하루는 자전거 라이딩. 5일 동안 6개의 코스를 혼자 걸었다.
나는 40대 반백수 여자 사람. 체력과 담력은 평균 이상으로 추정되나 많이 걸으면 발가락에 물집 잡히는 스타일. 일본어는 스미마셍,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밖에 모르고 영어는 조금 함.
규슈 올레길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고, 특히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러 개의 올레길을 걸은 후기를 거의 찾지 못했기에, 경험을 공유한다.
올레길?
올레길? 제주 올레 할 때 그 올레길? 맞다. 제주에 있는 올레길 일본에도 있다. 이름도 ‘규슈 올레’다. 사단법인 올레에서 수출했기 때문.
단, 제주도처럼 죽 이어져 있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이어서 걸을 수가 없다. 도시 간의 이동이 불가피하다. 장점이자 단점. 이동에 필요한 약간의 비용과 수고를 치르면 일본의 소도시와 시골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다.
규슈 올레에 대한 정보는 공식 사이트에서 정보를 제공한다.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코스별 웹페이지도 있지만 pdf형 팸플릿을 다운로드하면 도식화된 지도와 고도표 등이 표기된 지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시작 지점에서 종이 지도를 얻을 수 있는데 이 지도가 자주 꺼내보기 좋아 주로 이용했다. 3단으로 접을 수 있는 동일 규격의 지도라 가지런히 모아 놓으니 보기도 좋았다. (이 지도는 올레 사이트에서 찾을 수 없다.)
계획
나는 올레길을 걸으러 일부러 간 게 아니라 일본 갈 일이 생겨서 뭘 할까 하다가 올레길을 걸은 거라 대략의 동선을 먼저 정하고 그 동선에서 갈 수 있는 올레길 위주로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규슈 서쪽에 있는 올레길 위주로 걷게 되었다.
여행에서의 우연 또는 즉흥을 좋아하지만, 계획을 미리 짜두면 고민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이동이 잦은 여행은 계획을 미리 세우는 편이다. 올레길 기본 정보(출발지, 거리, 시간 등), 도시간의 이동 방법과 시간, 숙소 등은 미리 알아보고 대략적인 일정을 짰다. 덕분에 걷는 중에 이동 방법이나 숙소등을 알아볼 필요 없이 걷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일정
- day 1 일본으로 이동 https://blog.naver.com/comni/223451069876
- day 2 다케오 코스 https://blog.naver.com/comni/223451070518
- day 3 시마바라 코스 https://blog.naver.com/comni/223451071420
- day 4 미나미시마바라 코스 https://blog.naver.com/comni/223451375861
- day 5 구마모토 휴식의 날 (맥주 공장 방문) https://blog.naver.com/comni/223451603275
- day 6 야메 코스 + 구루메・고라산 코스 https://blog.naver.com/comni/223451931358
- day 7 후쿠오카 신구 코스 https://blog.naver.com/comni/223452849824
- day 8 자전거 라이딩 https://blog.naver.com/comni/223454915430
- day 9 태국으로 이동
전체적인 경험
하루 12~20km. 대략 평균 2만 5천보 정도 걸은 듯. 전체적으로 제주 올레보다 약간 험하다고 느꼈다. 가파른 산을 오르기도 했고 으슥한 숲길도 자주 지났다. 평일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코스에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숙소는 미리 다 예약을 했고 도시 간 이동은 구글맵의 도움을 받아 기차, 버스, 페리 등 현장 상황에 맞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영어는 거의 안 통했지만 이동하고 걷고 먹고 자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친절하게 도움을 줬다.
항공권
인천 - 후쿠오카 왕복 항공권 구하면 된다. 시기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부산에서 배로 갈 수도 있다. 나는 6만 5천 원짜리 평일 오후 편도 항공권으로 후쿠오카로 들어갔다.
올레길을 걷고 나고야로 넘어갈 계획이었으나 가족여행 일정이 취소되는 바람에 뱅기표를 그냥 날리고 태국으로 넘어갔다. 후쿠오카에서 방콕 가는 항공권은 한국에서 가는 것과 가격이 비슷한 듯. 어쨌든 그래서 왕복 항공권이 아니었다는 얘기.
숙소
모든 숙소는 출발 2-3주 전에 미리 예약했다. 게스트하우스, 캡슐호텔, 비즈니스호텔, 료칸 등 다양하게 이용했다. 북킹닷컴을 주로 이용했지만 숙소가 마땅치 않은 곳은 구글 지도에서 찾아 홈페이지에서 직접 예약하기도 했다.
교통 (도시 간 이동)
패스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알아보긴 했는데 이것저것 고려하기 너무 복잡하고 그에 비해 큰 매리트가 없어서 고려 대상에서 제외했다. 패스 등을 이용해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면 교통비를 아낄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교통비 아끼려다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아서 그냥 패스 없이 현금과 IC 카드를 썼다. (시마바라지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시마테츠 원데이 패스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으나 직접 사용해 보지 않아서 정확히 모름)
참고 :
산큐 패스 (버스, Ferry 이용 가능), JR규슈 패스 (기차만 이용 가능) 등이 있어 알아봤음.
패스는 보통 2~3일짜리라 어차피 패스를 2개 사야 하는데 그러면 3일은 버스만, 3일은 기차만 타야 함.
나는 버스와 기차를 섞어 타야 하는 상황이라 패스는 나의 상황과 맞지 않았음.
짧은 기간에 왕복으로 어딜 다녀오는 경우에는 유리하나 나같이 다양한 교통수단을 섞어서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장기간의 여행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식사와 물
사전 정보 없이 걷다가 근처에 있는 식당을 구글맵에서 검색해서 찾아갔다.
보통 리뷰가 많은 곳 중 4.0 이상의 평점이 있는 곳을 선택하면 실패할 확률이 적다. 보통 한 끼에 1000엔 전후로 한국 물가에 비교해도 별 부담이 없었다. 오히려 싸게 느껴지기도.
올레길 중간에 식당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배낭엔 항상 비상식량이 있었다. (바나나 빵 등)
숙소에서 자고 점심을 사 먹다 보니 물은 주로 숙소나 식당에서 보충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는 모두 탭 워터를 마셔도 된다고 했음)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으면 자판기에서 보리차 뽑아 마셨다.
옷과 신발
트래킹 여행이긴 하지만 너무 외국인 올레꾼으로 구별되지 않았으면 좋겠기에 일상복을 입고 갔다. 기능성 소재의 긴 바지와 반소매 셔츠, 그 위에 긴팔 셔츠. 20도 전후의 기온에 맞는 적당한 복장이었다.
올레길 한 코스는 길어야 12km이고 험한 산길이 아닐 것으로 예상, 나는 하루 한 코스 천천히 놀멍쉬멍 걸을 건데 등산화는 오바라 판단했다. 또한 이후 태국 일정들을 고려할 때도 등산화보다는 가벼운 운동화가 좋을 것 같아 운동화를 신고 갔다.
근데 올레에 산길이 꽤 있었다. 다음 일정 없이 올레길만 걸을 거라면 등산화를 추천한다.
핸드폰 & 인터넷
한국에서 eSIM으로 미리 주문했다. 매일 밤 와이파이 되는 숙소에서 묵고 모든 동선과 숙소를 이미 계획했기에 (검색이 불필요하단 소리) 하루 500M (소진 시 128Kbps 무제한)로 충분했다.
준비물
숙소를 이용한다는 전제 자체가 매우 편한 여행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전 일정 숙소를 이용하고 매식하는 일정이라 딱히 챙길 게 없었다.
- 옷가지 (반팔1 반바지1 속옷1 양말1 ; 낮에 입는 옷은 저녁에 빨아 널면 다음날 바로 입을 수 있다.)
- 자외선 차단 용품 (모자1 팔토시1 선크림1 ; 긴팔을 입고 모자를 쓰고 선크림을 사용했다. 팔토시와 마스크는 쓰지 않았다.)
- 세면도구(칫솔1 치약1 ; 수건을 안 가져갔는데 수건을 안 주는 숙소도 있더라.)
- 그 외 (비상약, 우산, 충전기 등 ; 우산과 우비에서 고민하다가 양산으로도 쓸 수 있는 우산을 가져갔다. 비오는 날 딱 잘 썼다.)
- 전자장비는 아이패드 미니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챙겼다. 안 가져가고 싶었지만 일본 이후의 일정을 생각해서 노트북 대용으로 챙겼다. (덕분에 태국에서 여행기 완료)
비용
항공권 제외 일본 현지에서 걷고 먹고 자는데 든 비용. 645,000원 (준비, 항공권 비용 제외)
- 숙박비 : 343,170원. 1박당 평균 4.3만 원꼴.
- 교통비 : 160,203원. 규슈 내 이동을 위한 버스, 기차 등의 교통비. 하루 평균 2만 원꼴.
- 식비 : 142,136원. 보통 하루 2끼를 먹었다. 하루 평균 1.8만 원.
숙박비와 식비는 개인의 여행 스타일에 따라 차이가 날 것이므로 교통비만 참고하시길.
아쉬웠던 점
- 보조 배터리 : 매일밤 충전하니 핸드폰 배터리가 충분할거라 생각했는데 모자랐다. 여분의 보조배터리를 챙길걸 그랬다.
- GPX : 올레 리본이 있으니 GPX 파일이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꽤 자주 필요했다. 시간이 있었으면 만들어서 오프라인 맵에 미리 넣어갈 걸 그랬다.
맺으며
규슈 올레의 풍경은 익숙함에 가까웠다. 올레길 자체는 특별할 게 사실 별로 없었다. 올레길이 특별한 이유는 길이 각지의 소도시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올레길이 아니었다면 가보지 못했을 도시들, 일반적인 관광의 목적으로 보면 별 매력이 없는 조용한 시골 마을들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규슈 올레길의 매력이었다. 소도시 구석구석을 걷는 것도 좋았지만 올레길을 걷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들도 좋았다.
하루종일 찍은 사진을 날리고 여행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고, 비가 와서 예정했던 올레길 하나를 걷지 못하고 맥주 공장 방문이라는 실내활동으로 하루를 보낸 것도 여행의 우연이 만들어준 재미난 경험이었다.
길
믿거나 말거나 난 올레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해진 코스대로 걷기 위해선 아스팔트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 걸으면서 리본을 계속 찾아야 하는 것은 매우 피로한 일이라는 것을 몇번의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땡볕에 그늘없는 아스팔트 길을 걸어야 하거나, 표식을 찾지 못해 당황스러웠던 적이 여러차례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묶여 있거나 색이 바래서 식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화살표는 있는데 다음 리본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인적도 드문 곳에서 지도도 동행도 없이 혼자 길을 걷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안전은 곧 마음의 평화로 연결된다. 리본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며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로 걷고 싶은 여행자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길이란, 걷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길이 복잡해서 계속 방향을 살펴야 하거나, 너무 험해서 발걸음을 신경써야 하는 길은 걷는 그 행위 자체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몸도 정신도 피로하다.
가장 베스트는 현재의 위치에서 방향 표식이 2개 이상 보이는 것. 그러면 걸어 가야 될 방향을 알 수 있고 두리번거리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길을 걸을 수 있다. 종종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으면 더 좋겠지.
사람
언제부턴가 여행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 뻔하다고 생각하여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어디서 왔냐, 얼마나 됐냐, 어디로 가냐 같은 뻔한 질문들에 지겹도록 답하고, 누군가가 베푸는 친절이 호의인지 사기인지 구별하기 위해 애를 써야하는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을 만나 말을 섞는 게 피로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와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를 만들지 않게 된다. 사람을 피해 다녔달까. 코로나 이전까지의 여행이 그랬다.
작년에 다녀온 스웨덴 덴마크의 여행이 좋았던 이유는 그곳의 자연환경에서 내가 좋아하는 자전거를 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순수한 호의와 친절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 빛을 발하고 그 빛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올레길을 걸으며 딱히 누군가를 면대면으로 만난 적도, 대화라고 할만한 것을 나눈 적도 없지만 기차 버스 숙소 식당에서 그저 스쳐간 사람들, 직접적인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들은 물론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자주 올라왔다.
결국 여행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여행을 거듭할수록 절실히 느끼게 된다.
여행의 모든 순간이 곧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별 기대 없이 갔고 큰 감동도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충분히 곱씹고 나니, 이번 여행이 여러 의미에서 꽤 괜찮은 여행이었던 것 같다. 계획도 여행도 마무리도 모두 참 잘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