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누가 자꾸 텐트를 흔드는거야. 눈을 떠보니 바람. 중간에 두어번 깨서 빠진 바람을 넣고 잤는데 여전히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다행히 입은 안돌아갔다.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한 잔 끓여 마시고 옷을 갈아 입었다.
망루에서 내려본 캠핑장 풍경
어제 밤엔 초저녁부터 쓰러져 자느라고 일몰도 못봤다. 일출이라도 보겠다고 텐트를 열고 나와보니 일출은 개뿔. 잔뜩낀 구름. 나와서 밤새 굳은 몸을 풀며 기상 체크. 바람이 세기는 하지만 춥지는 않은 온도. 심상치 않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기상예보를 보니 역시 비예보.
비를 맞으면서 짐을 정리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기 때문에 서둘러 철수하기로 했다. 0730 축축하게 젖은 텐트를 대충 접어서 쑤셔 넣고 바로 출발. 비양도 일몰 일출이 멋지다던데 아무것도 못보고 가게 생겼다. 비양도 진짜 다시 와야겠다.
이른 아침이라 길엔 아무도 없었다. 차도 없고 자전거도 없고 오토바이도 없다. 40여분을 조용한 도로를 천천히 달려서 선착장에 도착했다. 매표소 앞에 자전거를 세우려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딱 뛰어 들어가 8시30분 표를 끊고 바로 탑승. 승객이 나 혼자네?
배는 15분 정도 후에 성산항에 도착했다. 여전히 추적거리며 내리는 비. 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편의점에서 비도 피할겸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간식 몇가지를 챙겨서 다시 출발.
바닷가를 달린다. 비가 와서 더 조용한 바닷가. 계속 비를 맞으면서 달린다. 비속을 달리려니 기분은 째지네. 우비를 아래위로 입어서 비를 맞아서 크게 문제가 없었다. 우비 넣을까 말까 하다가 넣었는데 챙겨오길 너무 잘했다.
흥얼거리며 달리다보니 어느새 월정리. 지난 1월에 한달 살기를 했던 곳이다. 반가움에 잠시 쉬어가기로. 비가 추적거리는데도 바닷가엔 사람들이 많았다. 뭐 이 날씨에 우산까지 쓰고 바다엘 나온건지. 라는 생각이 드는걸 보니 나도 늙었구나.
월정리에서의 한 달은 우리 현자매들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였다.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고, 나의 자매들은 심플 라이프에 발을 들였고 그것을 계기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고마운 제주.
잠시 쉬었다가 김녕해변으로 달린다. 여러번 달린 길이라 익숙하다. 차도 없고 또 오른쪽으로 바다를 보며 달릴 수 있으니 좀 돌아가긴 해도 자전거 길은 무조건 해안도로다.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편의점에 산 호떡을 야곰야곰 꺼내먹으니 호떡이 꿀떡. 김녕해변. 그 아름답다던 김녕 바다도 비와 미세먼지때문에 뿌옇게만 보여 별 감흥이 없다. 지나간다.
12시쯤 함덕 해변에 도착 했다. 이제 비는 조금 잦아들었다. 해변에는 텐트 몇개가 보인다. 나는 정자에서 또 잠시 쉬었다 간다. 지도를 보니 제주항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늦어도 3시쯤이면 도착할 것 같았다. 앉아서 한참 여유를 부렸다.
어느새 신발이 다 젖었다. 쓰레빠로 갈아신고 달렸어야 했는데. 신발 양말도 다 젖고 우비도 물기는 바람에 다 날아갔지만 탈수기에서 꺼낸 옷을 막 꺼내 입은 느낌이랄까. 몸에 쩍쩍 붙는 느낌. 어서 비가 그쳐야 할텐데.
해변도로가 끝나는 삼양검은모래 해변의 한 정자에서 점심식사.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이상한 날.
제주항이 내려다보이는 사라봉 공원
1430 제주 선착장에 도착했다. 한 번 달려본 구간이라고 낯이 익었다. 어제밤에 예매한 표가 확인이 안되서 직원과 옥신각신 하다가 표를 발권받았다. 발권 받고 시간이 많이 남아 대합실에 앉아 멍때리는데. “여기서 또 만나네요” 어떤 아저씨가 아는척을 하셨다. 얼굴을 보고는 순간 누구지? 아. 산방산 아저씨다. 고글을 벗으니 전혀 다른 이미지. 못 알아보겠다.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다가 일반 승객이 다 타고 난 뒤 거의 마지막에 줄을 섰다.
산타루치아 호
자전거를 뒤편으로 싣고 배정받은 방으로 올라가니 코딱지만한 방에 아저씨들만 드글드글. 발냄새도 고약하고 충전할 콘센트도 없으니 방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밖으로 나와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휴게실 테이블에 앉아 있으려니 또 어떤 분이 와서 아는척을 하는데 이번엔 목소리도 얼굴도 정말 모르겠다. 고글과 복면같은 것들을 가리고 달리니 얼굴을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자전거 브랜드나 색깔로 알아봐야 하는데 사람만 와서 인사를 하니 이건 어떤 자전거의 주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얘길 맞추다 보니 라이딩 중 여러번 스쳐가며 인사를 나눈 그 자전거의 주인이었다. 나랑 거의 같은 일정으로 제주를 돌고 나주로 돌아가신다고 했다. 나는 그 분의 종주수첩이 신기하고 그분은 나의 페니어가 신기했다. 서로 신기한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인사를 하고 해산.
거지꼴이었다. 아침부터 젖은 텐트를 쑤셔 넣느라 손톱밑엔 때가 꼬질. 이틀을 제대로 못씻은데다 비맞고 땀까지 흘렸으니 몸에선 쉰내가 나는 것 같고, 모자에 눌린 머리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양말은 3일째 신고 있고, 저지는 5일째. 하하하. 집나가면 머 보통 그렇더라만.
보조 배터리를 충전하며 지루한 시간을 노트에 이것저것 끄적거리면서 보냈다. 배는 예정됐던 시간보다 20분이 지연된 2150에 목포항에 도착을 했다. 차주들 내려오라고 방송이 나왔는데 모텔 몇군데와 찜질방을 알아보느라 좀 늦게 내려갔더니 이미 문 앞에 도열한 자전거 떼.
라이트가 없는 야간 라이딩. 배에서 내리자마자 우비 위에 형광색 바람막이를 꺼내입고 냅다 밟기 시작했다. 6km정도를 달려야 했다. 배에서 엄청 피곤했는데 갑자기 초인적인 힘이 나기 시작했다. 지도를 이미 봐놨고 어려운 루트도 아니라 도로를 이용해서 질주하여 생각보다 빨리 찜질방에 도착했다. 아까 찜질방에 미리 전화를 해두어서 자전거는 계단 아래 안전하게 세울 수 있었다.
아 빨리 자고 싶다. 얼마만이냐 샤워기야. 쌰워를 하고 나니 개운. 완전 캐개운. 하루종일 비를 맞아서 그랬나 물도 많이 안마셨길래 500ml도 원샷했다. 충전의 압박에서 벗어나 마음껏 핸드폰도 사용하고. 내일 서울로 돌아갈 것이냐 영산강을 달릴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 코골이 아줌마들 사이에서 어렵게 잠이 들었다.
나는 내일 이시간에 어디에 있을까?
Topic: jeju-bike-touring-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