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혼자여서 괜찮은 하루
- 저자 : 곽정은
- 출판사 : 해의시간
- 날짜 : 26/03/2019
- 교보문고
팟캐스트를 통해 곽정은 작가의 새로운 책 소식을 들었다. 제목, 혼자여서 괜찮은 하루. ‘혼자여도’ 괜찮은 하루도 아니고, ‘혼자여서’ 괜찮은 하루라니.
궁금했지만 제주에 교보나 영풍같은 대형 서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서도 이런 따끈한 신간은 볼 수가 없다. 잊고 있었는데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을 만나게 되었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에든 갈 수 있어.
‘나쁜 여자’가 되라고 주변의 착한 여자들을 선동했던 나로선 천군만마의 아군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한국에서의 착한 여자란 남을 위해 사는 여자고 나쁜 여자는 나를 위해 사는 여자다. 결혼 여부를 떠나 많은 여성들이 착하게 살아간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내 마음을 돌보지 못하고 내 삶을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숙제하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비단 여자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지만 내 주변엔 그런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많으니까. 나에겐 너무나 반갑고 고마운 책이었지만 착한 여자들에게 어쩌면 이 책은 무척 불편하고 재수 없는 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인생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젊어서는 사랑, 인정, 돈, 명예, 성공을 쫓다가 삶의 어느 순간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나 자신으로 귀결된다.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사람은 불행할 수 없다. 왜? 혼자일 땐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고 나와 친해지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렇게 나에게 관심을 갖고 내 감정을 돌보고 나를 제대로 알게 되고 친해지면 나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을 바랄 필요가 없다.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적당한 거리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은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과는 다르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온전히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그 사랑과 관심이 밖으로 흘러간다. 여유가 있고 나눌 게 있다. 나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온전한 두 사람이 만나야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내가 만약 누군가를 다시 만난다면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물론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그런 사람이 나타났을 때 알아볼 수 있겠지. 저자는 연애가 이제 싫다고, 자기가 찾는 그런 사람은 없을 것 같다고 했지만 난 그런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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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사람과 떠나는 여행이, 혼자 떠나는 여행보다 나을 수 없다. 조바심과 두려움을 고백해온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을 인생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라고. 정말 중요한 건 내 삶을 스스로 어떻게 규정할 지 정하는 일이라도. 그리고 불안에 잠식되었떤 서른 살의 나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십 년 뒤, 너는 어리석던 시절에 한 선택을 되돌려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홀로 살아가는 마흔 살이 될거라고. 가끔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새벽을 맞을 것이고, 돌연 아프게 되면 혼자 낑낑대며 운전해 응급실도 가고 입원도해야 하겠지만, 대단히 힘들거나 서러운 일은 아닐 거라고. 결혼이 아니라, 다만 너의 통장이 너를 구원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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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는 절대 생길 것 같지 않던 경제적 자유가 지금 내게 있고, 스물다덧 살에 연애할 땐 없던 현명한 눈이 내게 생겼다. 조직 생활에 지쳐 가던 서른 사의 고통은 프리랜서의 자유로 대체되었고, 서른다섯에도 사라지지 않던 불안과 아집은 이제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으니까. 좋은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를 구별하는 눈,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확신, 선택의 기로에서 좀 더 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결단력, 무슨 일이든 결국 내 손으로 만들어가는 놀라운 추진력,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아도 나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즐거움. 바보 같은 이십 대와 이상했던 삼십 대가 모두 지나가고 나니 드디어 내 손에 쥐게 된 것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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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고 나면 누구든 자신의 삶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이 들어 나쁜 것은 하나뿐이지만, 나이 들어 좋은 것은 되려 많아지는거다. 인생의 깊이가 깊어지는 데에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이 제 발로 찾아오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나이 들어 있을 뿐.
하지만 얼마나 좋은가, 젊음은 내 곁을 떠나고 없지만 깊은 성숙이 나에게 도래했음이.
진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한 채로, 세상의 기대와 요구에 맞춰서 살았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마치 먹구름이 모두 지나간 푸른 하늘을 보는 것과 비슷해진다. 맑은 날 더 멀리까지 볼 수 있듯이,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또렷하게 보인다. 세상의 기대도, 부모의 기대도 아닌 정말 내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을 마주하는 마음만큼 상쾌하고 충만한 것이 또 있을까. 누가 곁에 있어도 불안하고 외롭던 날들에서, 그저 홀로여도 좋기만 한 날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만 만들어지는 상태가 아닐지. -
시간이 갈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몸은 더 젊어질 리 만무하지만, 마음은 더 깊고 우아하며 찬란한 빛으로 빛나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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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더라도 나는 확실히 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 그 고통에 대해 눈감지 않으리라는 것을.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절망도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며 감당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또한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나의 고통에 눈감지 않을 때, 타인의 고통에도 눈감지 않는 삶으로 향하리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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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왜 생겼는지 알았다면, 그 상처를 직면하고 부드럽게 매만지는 과정이 따라줘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의 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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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쑥불쑥 원망의 잔해에서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게 그저 잔해에서 피어오르는 먼지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거야’가 ‘그들로썬 그럴 수 밖에 없었을거야’로 바뀌고 나서, 결국 위로받는 것은 과거의 나였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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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면서 상대도 사랑한다는 거, 그건 일단 여기 존재하는 내 마음을 외면하지 않을 때라야 가능한 얘기다. 모두들 내 마음은 외면한 채, 너의 마음은 왜 더 커지지 않는지를 따져 묻는다. 절대 손해 볼 배팅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흰자위가 벌개진 새벽녘의 타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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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알아차려야 한다.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따뜻한 관심이 고프고, 늘 감정적으로 허기져 있었다는 것을. 또 한 편으로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더 좋은 삶과 관계를 누리고 싶은 현명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바보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현명한 나’를 알아차리는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도.
나를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아 온 마음의 안테나를 세우고 살고 있었다면, 이제 그런 나를 알아차리고 선택해야 한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나를 보아줄 사람을 찾아 다시 또 이 세상을 헤매다닐 것인지.
나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채로,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 얼마나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일인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데 인생의 좋은 시간을 다 보내는 일이 너무 슬픈 지점. -
우리의 이별은 전혀 다른 곳에서 마무리 된다. ‘최선을 다했지만 헤어졌다. 애썼지만 되돌릴 순 없었으며 그 모든 결과를 수용한다. 나의 이 슬픔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가슴께의 뼈가 아릿하게 느껴질 만큼 아픈 말들이지만, 이 말들을 스스로에게 소리 내 해줄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아프게 했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이별을 통해 나와 화해하고, 이 세계와 진정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너도 그저 나처럼, 행복하고 싶었구나’, ‘너도 그저 나처럼, 별것 없는 불안한 영혼이었구나’를 깨닫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바로 이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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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전부를 채워주는 것처럼 크고 멋지게만 보이던 사람이, 그저 나와 똑같이 외로워지고 싶지 않고 불안해지고 싶지 않아 힘들어 했던 사람이란 걸 깨닫는 순간은 참 아프다. 한때 내 모든것이었던 사람이, 그저 초라한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은 참 슬프다. 하지만 이별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걸 몰라서, 서로의 빈틈을 잘 채워주려고 노력했다면 좋았을텐데 각자 기대한 것이 너무 많아 그리되어 버렸다는 걸 깨닫는 것이 기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 인생이란 아이러니 그 자체지. 당신이 있을 땐 당신 없으면 안될 것 같은 나였는데, 당신이 떠나가고 나니 이제 알아버렸네. 나는 당신 없이도 너무나 잘 살수 있는 존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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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있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존감이 바닥인 채로는 인생의 거의 모든 상황이 위기 상황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 스스로를 존중해본 적이 없는데, 타인이 나를 존중하지 않을 때 어떻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까? 문제를 제기했다가 버림받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이미 지레 겁을 먹을텐데.‘아니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도 그 한마디를 해내지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삶이 비극적으로 흘러가는 건,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것을 되돌리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답은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나의 오류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을 헤쳐나올 힘도 생기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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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그렇게 말한다. 사실 사랑은 변해야 한다고.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고, 마음을 알아주며, 상대방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상대의 행복을 위해 애쓰지 않는 관계는 당장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는 무엇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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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길러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생각은 기성세대의 아주 오랜 생각이기도 하다. 혼자서 사는 삶은 외롭기 그지 없고,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의 양식이라는 생각.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 반드시 이뤄야 하는 목표라도 된다는 듯이. 개인의 행복은, 그것 자체를 추구하기보다 어떤 특정한 시스템 안에 들어갔을 때에만 실현된다는 것이 이 사회의 오랜 믿음이었던 것도 같다. 물론 낮은 결혼율과 출산율, 그리고 높은 이혼율 등 다양한 지표들이 이 오랜 믿음의 붕괴를 증명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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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사람들이 결혼을 했어도 서로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히고 종종 헤어지며,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 아이에게조차 큰 상처를 준다. 사랑은 어떤 제도에 들어가겠다고 마음먹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아이는 그저 두 사람의 의지에 의해 태어났을 뿐 그걸로 끝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고, 결실이 아이라는 말은 어쩌면 결혼과 양육의 고단함과 버거움을 잊기 위해 만들어진, 달콤한 주문 같은 말이 아닐까. 혼자서 잠드는 밤은 그저 외로울 수 있지만, 곁에 누가 있어도 외로운 밤은 괴로움과 외로움이 뒤섞인 밤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만 모른다. 그 어떤 삶의 양식도 감히 사랑을 ‘완성’할 수는 없다는 것도, 그저 아는 사람들만 알 뿐이다. 어떤 사랑은 헤어짐으로 완성되며, 또 어떤 사랑은 아픔을 통한 성장으로 결실을 맺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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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안한다던 결혼을 다른 여자와는 1년 만에 하겠다고 결심한 남자 때문에 상처받지 말길. 어쩌면 그는 네게 비겁한 남자였을지 모르지, 그저 이기적인 남자일지 몰라. 하지만 그렇다면 헤어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지 않니? 그는 그저 인생의 지금 이 시기가 되어 특정한 시스템을 선택한 것일 뿐, 그 선택과 너의 가치는 하등 상관 없단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완성이란 결혼을 하는가 마는가가 아니라, 나와 함께있는 자이든 나를 떠난 자이든 그의 행복과 평안을 빌어주는 마음에 달려 있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으니,너는 너대로 그와의 사랑에 이제 그만 마침표를 찍어야하지 않겠어. 너의 가치를 몰라본 사람에게 마음을 쓰기엔, 이 삶이 너무 짧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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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자신의 감정에 대해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지켜봐야 하는 것은 당신의 불안함과 서운함 같은 감정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감정에 대한 감정, 즉 ‘메타감정’은 둘의 관계를 가르는 아주 중요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이란 달래주면 사라지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서 ‘나 좀 이해해줘, 나좀 달래줘’라고 기대하고 대화를 시작했는데, 상대방은 내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자신에 대한 비난 혹은 공격이라고 느낀다면, 두 사람은 이런 대화 앞에서 더 멀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속내를 꺼냈지만, 오히려 골이 더 깊어졌다면, 대부분 두 사람의 ‘메타 감정’이 너무 다른 탓일 가능성이 크다. 경험상 이것은 쉽게 타협되지 않으니, 애초에 감정의 폭이 너무 다르지 않은 사람을 선택해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 좀 더 행복한 관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메타 감정이 다르다는 게 뻔히 보이는 사람에게 걷잡을수 없이 빠져다는 것이 인간이라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싶어 눈감고 명상을 하다가도 내게 불안을 선물한 그 사람의 행복을 바라며 울컥하게 되는 게 또 사랑이라서 말이다. -
명상의 목적은 겨우 감정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내 삶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들, 내가 처리하고 상대해야 하는 모든 상황에 대해 명료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상황이 지나가고 나서 후회하고, 왜 더 잘하지 못했을까 자신을 자책하는 일이 잦다면 결국 자신이 원하는 만큼 명료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사랑하는 이에게 충동적으로 이별을 고해 후회하고, 순간의 짜증을 어쩌지 못해 오랫동안 노력했던 일을 그르쳐버리는 것은, 사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일 뿐이다.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그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일 뿐이니까. 상대방을 고치는 일은 힘들어도, 상대방에 대한 내 생각과 입장을 수정하는 일은 가능하니까. 결국은 ‘어떻게 그 태도를 바꿀 것인가’하는 문제가 떠오르게 된다. 나는 그걸 명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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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호흡을 통해 명료함을 되찾기. 첫 번째 호흡에는, 그저 지금 이 순간 호흡의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만 온전히 주의를 기울인다. 두 번째 호흡에는, 몸의 감각에 집중한다. 그리고 마지막호흡에서는 스스로에게 명료하게 그러나 다정하게 질문을 해본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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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는 같은 유머에 웃음을 터뜨리고, 같은 뉴스에 눈물을 흘릴수 있는지를 본다. 무엇에 분노하는가의 문제는, 어떻게 살기 원하는가의 문제와 가깝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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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지. 자기가 아는 것을 안다고 뽐내며 말하는 여자가 한 명쯤은 있어야지, 웃지 않고 반대 의견을 말하는 여자가 한 명쯤은 있어야지. 절세미인도 아니고 어리지도 않지만 당당하게 관록을 뽐내는 여자가, 그래도 한 명쯤은 있어야지. 말의 내용보다 말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당신의 생각도 방송을 타는데, 그렇지? 나 하나쯤은 이렇게 당당하게 있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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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나는 연애가 싫어졌다. 첫 눈에 반했고 그 사람도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아서 느꼈던 행복과 설렘이 결국, 떠나갈 때는 철천지원수처럼 문을 쾅 닫고 씩씩대며 사라지는 순간으로 대체되는 것이
처음엔 서로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해줄 것처럼 노력하던 너와 내가 그 무엇도 상대를 위해서는 해주지 않을 사이처럼 차갑게 변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그토록 경멸하며 자신의 진실성을 강조하던 그가 사실은 가장 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또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정성을 쏟고 마음을 주고 그러나 상처를 입고 그것을 회복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야 그 상처로 인해 내가 많은 성장을 했을지라도 이제 그런 식으로는 나를 성장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인생의 시간도 나의 에너지도 정해져 있기에, 허투루 쓰기엔 모든 것이 절실해서겠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아야만 외롭지 않다고, 내 가치를 인정받은 거라고 생각하던 떄가 있었나.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줄어들면 서운해하던 내가 있었던가. 내가 그토록 사랑을 갈구했던, 너무도 커 보였던 당신들이 사실은 스스로의 문제로 이미 자유롭지 않았던 영혼들일 뿐이라는 걸 이제 알기에.
나를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한 채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썼던 날들이 가져다 주는 허무함의 정체를 이제 알기에.
나는 연애가 이제 싫어졌다. 하지만 또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지.
자신의 마음도 모른 채 타인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날들을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허름한 선술집에서든 값비싼 몰트 바에서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치 않는 사람이라면, 관계란 변하고 때론 퇴색하며 결국 소멸하게 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일지라도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나의 성장을 지켜보고 싶다고 용감하게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모르지 그런 사람이 나타나 진다면 그런데 또 모르지,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기나 할는지. -
크리스마스에 혼자 있으면 무능한 사람 같고, 어떻게든 데이트를 하면서 로맨틱하게 보내야만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이 있다. 혼자 집에 있는 크리스마스를 맞지 않기 위해, 조금씩은 애를 쓰는 것 같다. 외로우면 안 된다는 조바심, 남들처럼은 놀아야 할 것 같은 강박감. 그런데 그것은 마치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가지는 강박과도 비슷하다. 아주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행복에 대한 획일적인 생각 말이다.
좀 외로워도 되는데, 사실 혼자 있다고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일에 푹 빠져서 사는 인생이나 그저 좋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하하호호 웃는 삶도 썩 괜찮은데 라고 생각했다. 어떠어떠하게 보내야 한다는 법칙은 사실 때때로 허무하기 짝이 없다. 기억에 남는 건,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살기위해 노력하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애쓴 기록들뿐이니까. 남들처럼 이렇게 저렇게 보내기 위해 애쓴 시간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태도와 크리스마스를 대하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그렇게 다르지 않다. 아니 다를 리가 있나. 남들처럼 지내는 것, 남들처럼 노는 것, 남들처럼 행복해 보이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두는 사람은 크리스마스 하루뿐만 아니라 인생의 나머지 순간에 있어서도 그런 태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힘들다. 둘이라면 더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혼자여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어떤 날이든 씩씩하고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
어떤 친구들은 내게 묻는다. 그런 친구들은 하필이면 혼자 걷고 있을 때 별안간 전화를 해서 묻곤 하는 것이다. ‘지금 혼자 걷는다고? 목적지도 없다고? 아니 혼자 왜 궁상이야. 남들이 처량하다고 해. 그만 걷고 빨리 들어가’ 괜찮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으면 머릿속에 물음표가 살포시 떠오른다. 아니 걷는 일조차 혼자 하는 것이 어색하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어떤 일을 혼자 할 수 있어. 목적지가 있을 때만 걸어야 한다면, 그 삶은 얼마나 피곤한 삶이 되겠어.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을 처량하다고 느끼는 이의 삶에는, 호젓한 혼자만의 산책길은 영영 호락되지 않겠지. 혼자 공원을 산책하다 문득 책을 꺼내고 채 읽지 못했던 책장을 열어 생각에 잠기는 일은 너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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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셀리그만이 한 이야기 중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삶의 세 가지 길’에 관한 것이다. 그는 삶을 추구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했다. 바로 ‘즐거운 삶’, ‘몰입하는 삶’,‘의미 있는 삶’. (…) 즐겁게 사는 것도 중요하고, 몰입의 에너지를 경험하며 자신의 일에서 깊은 성장을 거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인생은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범위 이상으로 사용해 나뿐만 아리라 타인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어떨까. 삶의 의미란 그저 잘먹고 즐겁게 놀며, 열심히 일하는 시간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재능을 바탕으로 타인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삶으로 향할 때, 비로소 인생의 목적성이 뚜렷해지고 또한 그 결이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어떻게 성공하고, 어떻게 해서 잘 먹고 잘 살수 있을까의 고민은 많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서 얼마나 깊게 고민했었던가.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 말하면서도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늘 모든 것의 우위에 있지는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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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좋은 것들을 누리며 즐겁게 살고 싶다. 또한 내가 선택하고 추진하는 일 안에서 한없이 몰입하는 기쁨 역시 누리고 싶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내 삶이 타인에게 소중하고 귀한 의미가 되고 있는지 돌아보는 과정이 꼭 있어야겠지. 한 번 뿐인 소중한 삶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도록, 마지막 순간에 한탄과 아쉬움이 아니라 충만함과 기쁨이 자리할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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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가끔은 누군가의 아름다운 결혼사진을 보고 부러워하기도 하고, 혼자 잠드는 침대 한켠이 쓸쓸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대수롭진 않다. 가끔 부러운 것과, 내가 원하고 바라는 삶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언젠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 좋은 사람과 함께 하기로 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혼자서든 둘이서든 나는 행복하고 충만하게, 온전한 내 삶을 살 것이라는 것. 찬란했던 지난 10년이 나에게 가르쳐준 최고의 교훈이 바로 이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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