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썅년의 미학
- 저자 : 민서영
-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 날짜 : 27/07/2019
대한민국 출판계에 이런 제목의 책이 있었던가? 제목도 제목이지만, 내용은 더 대단하다. 꽉 막힌 하수구에 락스 물 부은 것 같은 기분. 4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 아주 속이 시원하다 못해 뻥 뚫린다.
저는 ‘썅년’을 자신의 욕망을 남의 시선보다 우선시하는 여자라고 정의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썅년입니다. 그리고 나를 썅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입니다. 저는 자신을 위해 앞으로도 욕망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욕망하기로 선택한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썅년들이여, 파이팅.
‘썅년’은 곽정은 작가의 <혼자여서 괜찮은 하루> 에서 말하는 ‘나쁜 여자’의 동의어다. 하지만 ‘나쁜 여자’와 ‘썅년’이 주는 임팩트는 크게 다르다. 쌍시옷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나만 그런 거야?
페미니즘이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사실 참 어려운 얘기다. 남자보다 여자가 약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인간으로서 모두 동등하고 존엄하지만 성별의 다름에서 오는 차이도 분명히 있다.
범죄는 주로 약자 또는 소수를 대상으로 한다. (만만하다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어른 입장에서 어린이가 만만한 것처럼, 남자 입장에선 여자가 만만한 거다. 약자와 강자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약육강식은 자연의 법칙과도 같다. 결국 어느 나라에 가나 범죄가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한밤중에 누군가 뒤에서 따라올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과연 그런 세상이 있을까? 아니 올까?
이 사회의 여자들에게 처신 잘하라는 말이 틀린 말인가? 위험한 나라에 여행을 가는 아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하고 군대에 가는 이등병 아들에게 잘 하라는 말이 곧 처신 잘하라는 말 아닐까? 물론 ‘처신을 잘 했어야지’라는 should have pp 형태의 ‘비난의 의도’가 아닌, 앞으로 조심하라는 ‘당부의 의도’가 담겼을 때의 이야기다. 의도와 맥락을 무시한 채 ‘여자’, ‘처신’이라는 단어에 분노하는 것은 열등감과 다를 게 없다.
과연 여자만 차별과 불평등의 대상일까? 시커먼 외국인 노동자나 시골로 시집온 베트남 처녀들은 단지 목소릴 내지 못할 뿐이지, 대한민국에서 여자보다 더 약자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시선으로 보는가? 이렇게 따지고 들면 끝이 없다.
진정한 배려란, 누군가가 약자이거나 모자라서 하는 배려가 아닌 동등한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 배려를 말한다. 페미니즘은 단지 사회적 인식이 바뀐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여자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 내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썅년이든 나쁜년이든, 내가 나를 인간으로서 먼저 존중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내 스스로 나를 여자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간으로 인식해야 한다. 남자들이 쎄 보이는 여자를 싫어하는 것은 쉽게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자가 호랑이를 만나서 반가울 리 없다. 배고픈 사자는 만만한 토끼를 찾아다닌다. 내가 스스로 만만한 토끼이길 선택한다면 늘 도망 다닐 수밖에 없다. 썅놈을 상대하려면 썅년이 되는 수밖에 없다. 만만하고 겁 많은 토끼보단 썅년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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